Day 3 제주 2일차 - 월드컵의 추억

by 베루

오늘 주자 집결 첫 타임은 오전 7시 20분. 일찍 오는 주자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고, 제주시 숙소에서 서귀포까지 가는 시간을 따져보면 우리 주자 운영팀은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서야 했다. 잠이 많은 나에겐 지옥과도 같은 스케쥴이다. 그래도 어제 밤에는 일이 늦게 마무리되지 않아 10시부터 잠자리에 들었고, 그래서인지 죽을 맛은 아니었다. (이러고 차에서 목 꺾어가며 자서 팀원들 깜놀)


오늘의 주자 집결지는 서귀포에 위치한 제주 월드컵 경기장 홍보관. 홍보관이라 해서 화려할 줄 알았는데 세금 낭비가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우리는 오전 6시경 도착했는데, 아직 안내 배너가 설치 안돼서 그랬겠지만 너무 황량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롯데시네마와 세계성박물관(!!!) 표지판. 잠원한강공원 들어가는 굴다리 같은 느낌이랄까. 곧 이어 조직위 스탭들이 도착했고, 황량한 그곳이 맞다며 불을 켰더니 이게 웬걸! 2002년으로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었다.


추억의 진공청소기

세팅을 완료하고나니 7시가 채 되지 않아서, 주자들이 오기 전에 홍보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앞에서 쓴 것처럼, 홍보관이라기엔 매우 조촐한 곳이었다. 자세히 보아도 10분이 채 안 걸릴만한 정도의 규모.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 당시 스탭,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기증한 유니폼과 네임택, 암밴드 등이 주요 전시물로 놓여있었다는 것. 얼마 전 평창 조직위에서도 각 프리젠팅 파트너사에게 기증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었는데, 내가 입었던 유니폼과 주자 가족들에게 나눠주던 깃발과 쉐이커 등이 보관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라는 게 확 와닿았다.


기증품도 물론 좋았지만 제일 좋았던 것은 등신대였다. 나는 등신대만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그래서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팀과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같이 일하는 협력사 분에게 매일 사진 찍어달라고 얘기하는데 그제 어제 하고나니 오늘은 부끄러움 없이 부탁했다. 매일 매일 찍어달라고 해야지! (ㅋㅋ)


2002 영광의 얼굴들과 함께

어제에 이어 오전에는 대부분이 외국인 주자들이었다. 오늘 첫번째 주자는 듣기만 해도 신기한 “톨스토이 손녀”. 어제 밤에 남자친구에게 ‘내일 톨스토이 손녀 본다!’고 자랑했더니, 톨스토이 손녀가 어떻게 있냐길래 정확히는 고손녀라고 말하자 고손주면 수백 명 있는 것 아니냐며 웃는 게 아닌가!


그래서 톨스토이 손녀를 맞이하기 전 얼른 구글링을 했다. 손녀의 이름은 Anna Tolstaya. 놀랍게도 톨스토이 가문 웹사이트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후손들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http://tolstoys.ru/en/tree/descendants/112-tolstaya-a-n/memoirs/ 대문호의 손녀를 만난다는 설렘도 잠시, 이 손녀라는 사람은 직업이 손녀는 아닐테고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이것 저것 찾아봤다. 문학 작품의 디지털화에 매진하고 있었다. 고조 할아버지 왈, 본인의 모든 작품은 모두가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야한다고 했다면서 말이다. 어찌 됐든 수백 명(?)의 고손주 중 한 명인 건 맞다. 난 확실히 똑똑한 친구와 사귀고 있군 ~.~



톨스토이 가문 웹사이트의 Anna Tolstaya 페이지


아무튼 톨스토이 손녀도 제주 신라호텔 앞에서 무사히 봉송을 마치고, 오전은 어제와 같이 수월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오후가 다가오자 일이 터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12시 30분까지 와야 하는 소비자 주자 3명이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틀 연속 노쇼 악몽인가, 오늘은 내가 뛸 차례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운영사무국과 주자들이 연락이 됐다고 전달 받았다. 곧 이어 현장으로도 전화가 왔다. 한 주자가 제주월드컵경기장에 왔는데, 어디로 가야 하냐며 전화를 한 것이다. 이렇게 안내하고 싶진 않았는데 다소 큰 목소리로 “롯데시네마 찍고 오시고요, 오시면 세계성박물관이 보일 거예요. 세계성박물관 입구 맞은편 문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제주도에 대체 성박물관이 몇개입니까???! 내가 예전에 갔던 성박물관은 잔디 깔린 곳에 커다랗게 있었는데 호호.


지금 보니 세계성문화박물관이군


몰아치듯 주자 응대를 하다보니 밥 때를 놓쳐서 1시 반이 넘어서야 중국 음식을 시켜 먹었다. 나름대로 야외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먹으니 소풍 온 기분도 나고 좋았다. 탕수육이 맛있었는데 많이 먹진 않았다. 입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오늘 일정이 3시 경 종료 되니,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 시간이 약 5시간. 그렇다면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구나 치밀하게 (?) 계산하고 점심은 조금만 먹었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주자 운영팀 중 선발대로 부산에 먼저 간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끼리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의논하다 카페에 들렀다 맛있는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한 팀원이 요즘은 무인 카페가 유행이라고 해서 가봤다. 벽은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메모지들로 가득했는데 가장 인상 깊게 본 메모를 공유해본다.


그래이스 Kim과 Paul Yoo의 불ㄹ...아니 로맨스...


저녁으로는 전복물회를 먹었다. 제주에 와서 일만 하다 가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전복이라도 먹었으니 됐다. 이제 육지로 간다! 부산아 기다려라!


귀여운 수호랑과 함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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