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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켈란 Jul 05. 2024

에세이 [딩크] 캐나다어힉연수와 첫사랑

펑춘일지-4

두 사람 @맥켈란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사랑이었단 걸.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캐나다 앨버타 주 에드먼턴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부모님 품 안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스스로 살아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자아독립만세) 하늘을 비스듬히 날아오른 비행기는 21시간 만에 에드먼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낯선 타지에 두 발을 내 딘 서투른 21살 동양인. 겁이 나기보다는 설렘이 컸던 기억이다. 국내 유학원에서 연결해 준 홈스테이 집주인이 ‘KATE’(당시 영어이름이다)라는 글씨가 적힌 종이를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몸과 짐을 실은 폭스바겐 세단은 한 시간쯤 달려 영화 ‘나 홀로 집에’ 케빈이 나와 인사를 건넬 것 같은 2층 주택가 앞에 멈췄다.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집주인은 지하로 나를 데려갔다. 계단을 내려가 들러본 공간은 방 2개 욕실 1개 거실 1개로 혼자 지내기에 제법 컸고 햇빛이 아쉬웠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이었다. 짐을 대충 풀고 챙겨간 팩소주를 빨며 솟아나는 잡생각들을 지우며 지새운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홈스테이 가족과 첫인사를 나누는 날이자 때마침 크리스마스였다. 특별한 인상을 주고 싶어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적힌 미키 마우스가 산타 모자를 쓰고 있는 티셔츠를 입고 계단을 올랐다.


‘아차’ 싶었다. 1층 입구에서 158cm 내 키 반 만 한 부처님 불상에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도 스리랑카에서 이민을 온 홈스테이 가족의 종교는 불교. “메리크리스마스!”만이라도 외치지 말걸.


분위기는 순간 머쓱해졌고 어제 마중 나온 아저씨가 서둘러 가족 소개를 했다. 아주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춘기 딸,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귀여운 여자아이와 가볍게 통성명만 하고 야채 카레를 나눠 먹었다.


조용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나갔다. 앞으로 1년 동안 다닐 에드먼턴 주립 대학교 어학원에 입학 신청을 하기 위해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서툴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노선도를 재차 확인하고 버스를 타서 정확히 학교 입구에서 내릴 수 있었고, 짧은 영어로 물어물어 어학원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준비해 간 서류들을 내고 입학 신청을 무사히 마친 후, 잠깐 숨 좀 돌릴 겸 중앙에 위치한 기다란 의자에 앉아 주변을 살펴봤다.


키가 제법 큰 동양인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멘트벽에 붙어 있는 학교 소개와 역사 글들과 사진들을 둘러보던 남자를 보며 학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눈이 마주쳤다. 가운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내 주변을 빙빙 돌던 그는 한참을 말없이 나만 바라봤다. 마음은 왜 졸이었던 건데. 그러더니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떼며 참 따뜻하게도 미소를 지었다.   


“Where are you from?”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이었다. 낯선 땅이어서 더욱 그랬는지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매일매일 손깍지 끼고 다니는 사이가 됐다. 3살 많은 24살 상연 오빠는 중국 영화배우 이연걸을 닮아 뚜렷한 눈 코 입을 가졌고, 마음은 봄을 닮았다. 포근하고 향기롭다.


입학시험 성적이 달라 아쉽게도 같은 클래스에 내정받지 못했지만(오빠가 우수하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매 순간 함께했다. 돌이켜보니 반듯하고 건강한 연애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될걸. 놀 걸.)


학교 앞 단골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카페라테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영어 문장을 쓰고 외웠다. 교내 헬스장을 찾아 함께 트레이드 밀에 올라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뛰던. 픽픽 웃었던 기억이다.  


서로 한결같았다. 오빠는 매일매일 내 가방을 들어줬고 자신의 하숙집보다 한 시간가량 더 가야 하는 스리랑카 2층 주택 집까지 바래다줬다. 불평 한마디 없이 늘 따뜻했던 고마운 사람이다.


반면 난 오빠에게 박했다. 애교도 없었고(술 마시면 생기긴 했다) 오빠의 배려와 선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여자 친구였다.


“옆모습만 보여주지 말고, 예쁜 앞모습으로 바라봐주면 좋겠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오빠가 뱉은 한 마디.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 고민하다고 마음속을 뒤져서 꺼낸 진심이었겠다. 싶다. 내 사랑이 들킬까 봐 쑥스러워 무뚝뚝했고 모질게 굴었다. 어리석은 사랑이었다. 첫 문장처럼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사랑이었단 걸.


주말까지 데이트를 했기 때문에 추억이 참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눈이 무릎까지 쌓인 한 겨울 오후, 오빠와 나란히 걸어가다 본 오로라.(우주에서 지구로 유입되는 하전 입자들이 고층대기의 기체들과 충돌하며 빛을 내는 신기루 같은 현상이다.)


인디언핑크 코발트블루 그린올리브로 묘하게 알록달록해진 하늘은 말없이도 사랑이 깊어지기에 충분했다.


첫 키스를 나눈 건 만난 지 200일째 되는 날. 풋사랑이었다.


가수 휘성이 부른 리메이크곡 ‘일생을’을 함께 들으며 와인을 마셨던 늦은 오후였다. 충만한 날이었지만 아쉬운 밤이었다. 내가 신청한 휴학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먼저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서다. “키스해도 돼?” 멍청이. 그걸 왜 물어. 고개를 끄덕였고 포갰다. 사랑이었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한 달간 캐나다 주요 도시를 가로지르는 횡단 여행을 떠났다. 오빠와는 첫 여행지인 밴쿠버와 빅토리아 섬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5만 원이나 하는 맛없는 감자탕을 먹어도 행복했고 내 몸만 한 갈매기 떼들이 달려들어도 마냥 신이 났다. 어느새 오빠와 ‘안녕’하고 다음 도시인 오타와로 향하는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왔다.                   


오빠의 동그란 두 눈에 그렁그렁 물이 맺혔다. “바람나면 절대 안 돼!” 나를 꽉 안고선 두툼한 편지봉투를 건넸다. 전날 밤 나도 오빠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우리 통했다! 며 배낭 앞주머니를 뒤져 두 손에 쥐어졌다.


그렁그렁 눈물은 흘렀고 버스에 올라탄 무심한 여자 친구는 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 남자 친구가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펑펑 울었다.


100일이 지났다. 오빠가 오는 날 인천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두 근 반 세 근 반.


출국 게이트에서 나와 날 발견한 오빠는 만개한 미소로 뛰어 오더니 포근히 안아줬다. 오빠의 두 눈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사랑의 온도는 더 따뜻해져서, 대학생 4학년 2학년 커플은 어린 햇살 아래서 뛰어놀았다.


사랑의 시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마무리도 서로 달라진 시간에서 끝이 났다. 졸업을 앞둔 오빠는 취업 준비에 돌입했고 토익 토플학원과 스터디 활동으로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줄어들었다. ‘여의도 금융맨’이 되고 싶다는 오빠의 꿈을 응원했고 마침내 이뤘다.


직장만 들어가면 예전처럼 오빠를 자주 볼 줄 알았다. 웬 걸. 여의도에 힘들게 입성한 신입 청년은 점점 시들해져 갔다. 월화수목금 야근에 주말이면 녹초가 되어 여자 친구를 보러 겨우 나왔다.


꾸벅꾸벅 졸거나 힘이 없는 모습을 보면 함께 있어도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오빠는 내 생일까지 잊어버리고 야근을 했다. 전화나 문자도 없이.


참았던 섭섭한 감정이 터졌다. 생일날 밤 이별을 고했고, 오빠는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말로 헤어짐을 받아들였다. 붙잡지 않아서 더욱 서운하고 기분 더러운 그날, 친구 애경이를 붙잡고 한참 울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1년 후다. 운이 좋아 대학교 3학년 가을에 어릴 적부터 꿈꿔온 기자가 됐다. 첫 직장은 국민일보. 상연 오빠가 야근을 하고 있을 여의도에 있어서 첫사랑 생각이 났다.


잘 지낼까? 우연히 볼 수 있을까? 막상 자본주의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보니 세상이 참 얄궂고 짤 없다. 주 5일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는 미생이 되어보니 당시 오빠가 이해가 됐고 짠했다. 연애는 사치가 되는 시절.


우연일까. 인연일까.

선배들과 식사를 하고 회사로 들어가는 횡단보도 앞이었다. 길 건너 이삭 토스트집이 있었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허겁지겁 토스트와 바나나우유를 먹고 있었다.


상연 오빠다. 배고픈걸 못 참곤 했는데 여전해서 반갑고 귀여웠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흰 셔츠에 버건디 색을 입은 넥타이를 입은 모습을 보니 ‘여의도 금융인’이 다 됐다. 조금은 야윈 듯 보였다. 그래도 끼니는 잘 챙겨 먹는 거 같아 다행이다. 싶더라.


모른 채 지나갔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상연 오빠와의 추억은 오로라다. 아름답기만 하고 신기루 같은 기억이다. 부디 행복하고 건강하길. 안녕. 나의 첫사랑.  




안녕. 나의 첫사랑 @맥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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