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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촌네글다방 Dec 26. 2023

토끼

쪽글

  "엄마, 눈부셔..."

  첫째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깬다. 어느새 아침 햇빛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떤 창문을 통과하냐에 따라서 햇빛은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투명한 통유리창, 멜란지 그레이 색의 커튼 사이로 부끄러운 듯이 들어오는 햇빛은 실크처럼 부드러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 앞의 자의로 걷을 수 있는 커튼 대신에, 살짝 두꺼운 녹색 전선이 격자 형태로 교차되어 있다. 아늑함 대신에 무거움을 자랑하는 그 창을 통과하는 햇빛은 방금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카롭게, 그들의 눈을 향한다.


  그녀는 주변에 웅크려 있는 새끼들의 윤곽선을 응시한다. 그녀는 이들의 어미이지만, 애들의 성별과 나이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의 누구도 그녀에게 무정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일부는 옆 방으로 옮겨지기에 그녀는 자식의 수 조차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방은 교도소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처박힌 독방과 같아서, 해가 길게 들어오지 않아 아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저 냄새와 목소리로만 자식들을 구별할 뿐이다. 그녀에게 자식은 냄새이자, 아지랑이이자, 추억 한 모금일 뿐이다.

  그녀가 사람이라면, 아마도 별명은 '사회적 맹인'일 것이다. 두 눈이 있으니 볼 수는 있으나, 볼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시력의 상실이 가져온 대가는 갈수록 예민해지는 후각, 청각이다. 그녀가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으니, 카르페 디엠 하라'는 말을 안다면, 아마 좌우명으로 삼을 듯하다.


  그녀가 사는 곳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가끔씩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옆 방에 있는 동족들을 하나 둘, 창문 밖으로 꺼내간다. 그리고 꺼내진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그때, 그녀의 후각과 청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해가 지고, 달이 뜰 때도 소음을 느낀다.

  그들은 이를 '호출'이라고 부르는데, 호출 전에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 첫 번째로 소리다. 그녀가 전력 달리기로 40초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벅서벅' 소리. 동족의 발자국 소리보다 훨씬 크고, 느리고, 무거운 그 발자국은 창문 바로 앞에서 멈춘다. 가끔은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도 있지만, 보통 한번 멈춘 그곳에서 그 발자국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쯤 되면 그녀와 주변의 반응은 제각각으로 나뉜다. 창문이 열리고 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짧은 다리로 지면을 박차면서 방방 뛴다. 동공이 확대되고, 자신이 선택받는 이 상황을 부정한다. 다른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는다. 커진 눈으로 고개를 요리조리 돌릴 뿐 저항하지 않는다.

 

  창문이 살짝 열린 틈으로, 나무 기둥처럼 거대하고 기다란 막대기가 쑥 들어온다. 이 막대기는 먹이를 주고, 갓 출산한 아이들을 강탈하고, 지금처럼 이웃들을 무자비하게 꺼내갈 때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의 끝에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5개의 작은 막대기가 달려있다. 이것은 그들의 귀를 쥐어잡고, 창문 밖으로 꺼낸다. 연민과 동정이 제거당한 채로 태어난 듯한 막대기들은, 그들에겐 소름 끼치게 강력한 존재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막대기가 3번 방에 먹이를 넣기 위해 창문을 연 순간, A가 잽싸게 방을 탈출한 것이다. 막대기는 나지막하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뱉어냈다. 서벅서벅 소리가 여러 개 들린다. 순식간에 불어난 막대기들은, 빈틈없이 탈주범을 찾아다녔다. 높고 낮은 여러 목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방에 갇힌 그녀의 이웃들은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유추하느라 바쁘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젯밤에 이야기하더라고. 오늘 첫 번째 먹이 시간에 뛰쳐나갈 거라고. 창문 밖의 세상이 너무 궁금하다고 했어." B1은 말한다. "언젠가는 바깥을 보게 될 텐데, 왜 뛰쳐나가는 걸까?" B2가 물었다. 그녀는 "끌려간 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데."라고 답했고, 이 중에 가장 나이 많은 B3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어떤 꼴을 당했는지 다들 알잖아? 꺼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그 비명 소리는 뭐겠어?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풀을 뜯는 게 전부라고. 아침부터 시끄럽게만 하고 말이야". 그렇게 그곳엔 강요된 침묵과 불편한 평화가 찾아왔다.
 

   B1의 창문 앞에 살랑이던 잡초가 약 3천5백 번째 흔들리던 때, 모두의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A의 생포를 자축하듯 막대기들은 짧은 함성을 외쳤고, 그 사이로 A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A와 나머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쨌든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은 명백하다. "앞으로 비가 2번 오기 전까진 그들 중 누구도 호출되지 않겠군."이라며 B3는 쓴 한숨을 내뱉고, 그녀는 천천히 아침에 먹은 풀을 소화한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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