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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촌네글다방 Jan 16. 2024

에세이

우연히 뜯긴 흰색 벽지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누런색 벽지.
박스 안의 썩은 귤 하나와, 그 옆을 지킨 대가로 샛노랑을 잃고 곰팡이를 받아들일 귤친구들.


빨간 입술, 하얀 속살을 내보이며 싸구려 디지털 향을 풍기는 스마트폰 속 아이돌들.
창문 밖, 앞이 안 보이는 빗 속을 뚫고 치킨을 배달하는 오토바이의 굉음.
치킨의 빠른 도착을 위해 배달원의 목숨을 베팅한 주문자의 손끝.
위암 진단을 받고 너무 억울하다고 울먹이던, 전화기를 넘어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엄마의 목소리.


타인의 눈물과 고통이 불편한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툭 던지는, "참 안 됐어요."라는 얕은 한마디.

종소리의 의미와 무게를 가늠하지 않고, 당목을 남근처럼 휘둘러 그저 울리기만 하려는 자.

존재와 현상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신적 귀머거리들.

무지개 색의 잎으로 자신을 덮었으나 뿌리가 없으니 향이 날리 없는 종이꽃.


십계명을 뿌리쳤지만 십자가에는 기도하는 옥반지와 기름을 둘러친 그 두 손.
보도블록 위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를 미동 없이 응시하는 두 눈.
길, 버스정류장에서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담배연기를 힘껏 내뿜고 가래침을 툭 뱉는 할배들.
그들의 목에 밧줄을 옭아맬 수 있는 교수대를 뚝딱 지어내는 섬뜩한 상상력.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멋진 유니폼으로 가난을 감추는, 바쁜 청춘들.
그들을 고생한 적 없는 부유한 세대라고 손가락질하고, 핏대를 세우며 비난하는 꼰대들.
그런 그들이 죽을 때, 믿어 의심치 않던 가족들에게 모욕의 손가락질을 받길 고대하는 나의 기도손.
'나는 상관없으니 괜찮은 거지?'로 귀결되는 악취 나는 시대정신.


이 모든 것들이, 나는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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