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3달전, 민수는 새롭게 거주할 집으로 이사를 완료하였다. 부엌, 방 2개, 화장실로 이루어진 이 집은 침실과 드레스룸을 분리하고픈 그의 목적에 딱 맞는 곳이었다. 그렇게 첫 방문만에 급하게 가계약금을 치룬 집이었다.
직장까지의 거리, 이 가격에 처음보는 남향을 자랑하는 이 집은 99.9% 그의 마음에 들었으나, 이자타공인 둥글둥글한 인성의 소유자인 그에겐 신경 쓰이는 것이 딱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드레스룸으로 사용하는 방의 구석이다. 드레스룸의 형태는 흡사 꼬깔콘과 비슷한데, 꼬깔콘의 꼭짓점처럼 그 방의 구석은 약 45도의 각도를 가지고 있다. 이전의 직사각형 원룸에서 사용하던 집기 중에는 그 공간을 낭비 없이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처음엔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그는 공간을 볼 때마다 예전 여자 친구가 떠오른다. 수능 때 풀지 못했던 수리영역의 4점짜리 문제처럼 난해했던 그녀. 우주처럼 거대했던 그녀의 매력은 범상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귄 후 약 4달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넌 날 채워주지 못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증발했다. 그렇게 그녀는 예사로운 그의 깊은 의식 속에 박혀있는 판도라의 상자 안으로 스윽 스며들었다. 한번 곁눈질로 그치던 구석 공간의 응시는 어느새 두번, 세번으로 바뀌었고, 그는 구석을 바라보면서 밥 대신에 공허함을 그릇에 담아 쩝쩝거린다. 구석에 대한 이유 모를 집요한 집착의 덫에 빠진 것이다.
방충망 너머에서 나풀거리는 나뭇잎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그는 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환청을 듣는다. "이젠 날 채워줄 수 있겠어?" 자신도 모르게 입과 동공이 쩍 벌어지고, 누가 붙여줬는지 모를 담배 한 개비가 데굴데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제 우리도 그의 의식을 따라서, 구석을 "그녀"라고 불러야겠다.
텔레파시를 들은 후, 그는 적수를 앞에 둔 맹렬한 투견처럼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선, 예전 집에서 사용하던 사각형 위주의 물체들을 욱여넣었다. 당연히 이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 보관함이 나였다면 억지로 마름모인 척이라도 했을 텐데..'라며 그는 아쉬워한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아쉬움일 것이다. 나중에는 커다란 등을 놓으려고 했다. 19세기 영국 런던의 길거리에서 볼 법한 스타일의 전기등을 후보에 뒀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녀에게 빛이 찾아온다고 하니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녀는 응당 음침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과거나 현재나 그녀를 채운다는 것은 쉽게 풀 수도, 풀릴 수도 없는 난제이다. 그는 점점 기이한 것들에 관심을 둔다. 커다란 불상, 약 1미터 정도 크기의 성모 마리아상, 그리고 1.7미터가 넘는 크기의 난을 심은 화분 등, 정말 많은 후보군이 그의 신용카드를 스쳐갔다. 그의 행동은 심히 이치에 어긋난 부분이 있다. 그녀는 칠흑 같은 심해이다. 그런데 생명, 영생, 의미, 숭고함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가진 상상력의 크기는 여의도 면적과 비슷하다.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되는 소품 같은 그것처럼, 굉장히 제한적이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다. 이제 그녀를 보면 머리가 아파온다. 결국엔 은퇴를 앞둔 복싱 선수처럼 주먹을 내리고 아이보리색 장판에 대자로 뻗어버린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구나. 이번에도 그녀가 원하는 걸 주지 못했어."라고 자책하며 그는 잠에 빠진다.
위이이-이이이-잉. 한 여름밤에 찾아온 모기의 비장한 날갯짓이 그의 귀를 괴롭히자, 짐짓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몸일 일으킨다. 그 모습은 흡사 관에서 슬며시 기지개를 켜는 드라큘라와 비슷하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무의미한 행위는 제쳐두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문제의 해답지를 펼쳐본 어린아이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띤다. 그녀를 채울 방법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 나는 마름모가 될 수 있어. 저 구석에 딱 맞는 마름모.'라는 생각이 의식을 잠식한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그의 앞에는 플라스틱 계단이 놓여 있다. 그 계단의 종착지는 그녀의 겨드랑이 부근이다. 그리고 그녀의 왼팔은 심판의 검을 높게 쳐든 미카엘의 그것처럼 높이 솟아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 위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원형의 무언가가 대롱대롱 달려있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계단에 다가선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몸은 가벼워진다. 사회적 계약이 강요한 짙은 회색의 정장 재킷, 바지, 넥타이를 벗어던진다. 이 계단의 끝이 어딜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에게 계단은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벽담일 뿐이다. 넘어서리라, 그리고 가까워지리라. 계단을 오르니 원형의 크기가 그의 머리보다 살짝 작은걸 눈치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쑥, 원의 안쪽으로 집어넣는다. 자신의 입술보다 훨씬 건조하고 메마른 그것의 질감을 음미한다. 투-웅. 지구의 바닥이 붕괴되는 느낌과 함께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는 다시 눈을 뜬다. 몇백 광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먼 거리에 맥반석 계란 같은 모양의 구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구체는 5대 5의 비율로 하얗고 노란 세계인 상단과, 핏빛 색을 띠는 하단부로 나뉘어 있었다. 평소에 그는 입버릇처럼 클리셰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저 구체는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국과 지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그 계단은? 그녀는 어디 있는 거지?"라는 혼잣말과 함께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는데 딱 30초가 흘렀다. 구체에 점점 가까워지는 와중에, 자신이 상상하던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가 클리셰만큼이나 혐오하던 정치인들, 거짓 선지자들이 천국에 있을 것이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지상에서 면죄부를 팔던 자들이며, 세 치 혀를 날름거리며 스스로에게 천국을 약속한 존재들. 그들과 같이 사느니 차라리 한번 더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그는 지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옥에는 신을 부정한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이 있을 거야. 유일신을 부정해 유대계에서 추방당한 아인슈타인처럼 말이야. 그러면 인류 최대의 천재들이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당하고만 있을까? 아마도 지금쯤이면 지옥의 보일러를 조작하여, 지옥불을 동네 목욕탕의 열탕 수준으로 낮출 수도 있겠지. 그럼 적어도 불지옥은 없겠군." 거기에 덧붙여, 이미 삶을 포기한 그는 지옥의 과학자들과 이야기하며 얻을 삶의 지혜가 무엇일까를 궁금해한다. 그리고 방향 모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띠리리리띠띵. 낯익은 전자파음이 들려온다. 다시 눈을 떠보니 공간을 부유하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변함없이 우중충한 아이보리색 장판이 그를 받치고 있다. 쓰레기를 뒤지다가 행인에게 발각된 길고양이의 다급한 몸놀림처럼, 왼손으로 황급히 목을 만져본다. 어떤 자국도 없다. 오돌토돌한 닭살이 좀 만져질 뿐이다. "아.. 꿈이었구나.."라며 주위를 둘러본다. 굉음을 내는 전화기의 액정화면엔 10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중학교 동창의 이름이 떠있다. 따뜻한 지옥불을 기대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기억하며 회한의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전화를 받으면서 생각한다. 직사각형 형태의 투룸으로 곧 이사를 가야겠다고. 그래야 살 수 있을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