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전에 거주하던 방은 10평 남짓의 작은 투룸이었다. 이사를 가기 전부터, 나에게는 침실을 동굴처럼 꾸미고 싶었다. 이를 위한 대원칙은 '침대에 누우면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과도하게 안락한 방'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은 침대에서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도록 가구를 배치할 것. 그리고 불상을 배치해 석굴암과 같은 신비로움을 더할 것. 이러한 내 목표는 줄자와 약간의 상상력, 5만 원짜리 중국제 불상의 힘으로 대성공을 이뤘다.
나만의 석굴암은 나에게 무한정 게으를 수 있는 권능을 주는 듯하다. 그래서 나에게 '주말 오전 10시 이전에 일어나기'는 하루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는 것처럼, 생각보다 훨씬 큰 각오가 필요한 행위이다.
치사량 수준의 안락함 때문인지 주말에 약속이 없는 날은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다.(생각해보면, 이것은 내 몹쓸 생활 성향 중 하나이다. 이사를 오기 전부터 이랬으니까.)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없으면 내가 집 바깥의 공간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 구글 캘린더가 비어있는 주말에 내 이산화탄소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은 나의 집뿐이다.
그나마 요즘은 북클럽 참가, 여자 친구와의 대외활동으로 주말에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내 인생에서 주말에 이렇게 바쁘다는 게 너무 낯설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집과 외부라는 상이한 공간에서 홀로 존재할 때 느끼는 감정의 다른 이유가 궁금해졌다. 집에서는 혼자여도 누구보다 안락하게 느끼는 내가 밖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집에서는 내가 맘대로 행동할 수 있고, 공간의 분위기를 나의 무드와 일치시킬 수 있다. 오직 나만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내 안위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어떠한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는 불확실성을 나에게 제공한다. 이로 인해 나는 점점 불안해지고, 길거리에서 식수를 애타게 찾는 길고양이처럼 존엄성을 박탈당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든다.
또한, 외부에서의 나는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이는 외부 상황이 선제적으로 나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내가 오히려 먼저 그것을 '이해'하고 타인이 야기하는 상황에 나 자신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 내 모든 감각이 종속되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석굴암을 벗어나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건 대책 없는 지루함과 공허함이다.
나를 기다리는 상대방이 없는 장소에서는 집중할 것이 없다. 그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인원 중에 한 명.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간다는 걸 느끼는 순간 '내가 여기서 숨을 쉴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홀로 존재하는 공간은 바텐더와 같다. 나에게 상실감, 무력감, 약간의 분노를 섞은 위스키 한잔을 차가운 미소와 함께 들이밀며, 내가 이 공간에서 갖는 의미를 '위스키 한 잔을 해치우고 바로 퇴장해야 하는 존재'라고 냉소적으로 속삭이는 바텐더. 나는 이 잔을 마지못해 들이키며, 지하 10층 정도의 깊이에 이르는 한숨을 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 순간 나는 피난민과 같다. 공간이 나를 거부함으로 추방당한 존재. 두 어깨는 짐짓 무거워졌지만 이를 표출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주민등록증에 나는 어엿한 서울 시민이고, 어떠한 영수증도 결제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쥐고 있기에, 아직 나에겐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부질없다. 왜냐면, 나는 이미 내가 점유한다고 느꼈던 공간이, 이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추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릴없이 공간에서 체류할 권리를 반환하고, 나만이 숨 쉴 수 있는 동굴로의 복귀를 간절히 바란다. 그 어떠한 예외도, 변화도 없는 그곳.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눈을 감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그곳.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어떠한 존재가 나에게 속삭인다.
'그 방은 너를 영원히 받아들일 거 같아? 그 방이 너를 허락하는 거야.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은 이제 2년도 안 남았어. 착각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