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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구스 덕분에

사랑하는 한글날, 개념적 점화작용

by ItzMe
<마더구스 _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열 명의 흑인 소년이 식사를 하러 갔다가
한 명이 목이 막혀 아홉 명이 되었다.

아홉 명의 흑인 소년이 밤 늦게까지 깨어있다가
한 명이 늦잠을 자서 여덟 명이 되었다.

여덟 명의 흑인 소년이 데번(Devon)을 여행하다가
한 명이 거기에 남아서 일곱 명이 되었다.

일곱 명의 흑인 소년이 장작을 패고 있다가
한 명이 자신을 반으로 갈라 여섯 명이 되었다.

여섯 명의 흑인 소년이 벌집을 가지고 놀다가
호박벌이 한 명을 쏘아서 다섯 명이 되었다.

다섯 명의 흑인 소년이 법률을 공부하다가
한 명이 대법원으로 들어가서 네 명이 되었다.

네 명의 흑인 소년이 바다로 나갔다가
빨간 청어가 한 명을 삼켜 세 명이 되었다.

세 명의 흑인 소년이 동물원을 걷고 있다가
큰 곰이 한 명을 괴롭혀서 두 명이 되었다.

두 명의 흑인 소년이 햇빛을 쬐고 있다가
한 명이 햇빛에 타서 한 명이 되었다.

한 명의 흑인 소년이 혼자 남았다.
그가 목을 매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한글날.


굳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그저 문득
기억으로부터 어떤 계기로 인해 점화된
마더 구스의 <누가 울새를 죽였나?>
부터였다.

그리고 이어 자꾸 일어나는 개념적 점화효과로 인해
그것에 등장하는 새들의 종류가 궁금해졌고,
찾다가,
원본 이후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중 하나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적 있던 마더구스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를 떠올리게 되었고,

사고는
펄떡이는 연어처럼
흐르는 기억의 강물을
자꾸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나는 가운데 이솝 우화를 스치기도 하며
그렇게
천지도 모르고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만,
갑자기 튀어나온 사진 한 장에 꽝 하고 머리를 박고 나동그라졌다.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제시된 점화의 막다른 길이
이 곳일 줄은,
이 곳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나는

곧 바로 이상한 물리적 현상을 맞는다.

펑 터진 눈물.
몰아쉬어지는 호흡.

그런 내게 내가 놀라면서
티슈를 훅 뽑아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내자

어렴풋한
여덟 살의 내가
아홉 살의 내가
열 살의 내가
. . .

눈 앞에 아른거리며 서있다.



여덟 살의 수호지가
아홉 살의 수호지가
열 살의 수호지가


오랜만이지?
많이 변했네.
난 너의 어릴 적만 기억해서.......

라고,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미안해서
고마워서
고마워서
감사해서
간만에 희한한 감정으로 애처럼 울어봤다.


지금의
나란 인간이
있을 수 있도록
여러 곳의 문을
성심성의껏 열어주었던
고마운 내 세포같은 벗들.



용왕님께 드리기 싫어
씻어서 해가 잘 드는 곳에 곱게 말려두었다가
나 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내 간을 찾았다.


죽은 울새야, 고맙다.
마더구스! 고마워요.



난 이제
아직 버리지 못한 나의 성질.
즉, 욕심과 집착

그리고
교묘히 스스로마저 속이는 합리화된 의미부여로
저 책을,
저 책들을,
다시 갖고자
꽤 많은 시간적 낭비를 하게 될 것이다.


아,
어디에선가, 한 사람 쯤은
이런 감격에
공감해 주겠지?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몹시 공유하고픈 감정이거든.

사랑하는 한글날.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닌,
그러나 내겐 의미가 대단해져버린,
사랑하는 한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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