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월리 수국 정원. 어머니
어릴 적 넓은 다다미방이 있는 적산가옥에 살던 기억 속의 정원에 항상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면
언니와 나는 풀 먹인 모시 등지게를 입고 있었다. 시집가지 않은 두 이모들도 마찬가지...!
엄마는 8형제 중의 맏이라 외할머니를 도와 가족들의 의류를 책임지는 재봉틀을 밤낮없이 끼고 살았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살이 하던 처녀 때부터 그랬다고 한숨 쉬듯 말하시곤 했었다.
누구나 집안의 희생양은 한 사람씩 있어 그 역할이 주로 장녀였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엘리트 기질이 있어 생활 속에 익혀진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문장력도
있는 편이라 동네에 거주하던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성들이 찾아와 의지하는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코흘리개 나를 벗 삼아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영화를 한 번씩 보러 가기도 하던 외로운 신식 여자였다.
그녀의 이런 독립적 자아는 연세가 많아 너싱홈에 입학한 후에도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머리맡에 책 한 권과 커피, 단정한 옷차림이 유지되어 있었고 내가 제철 과일을 가져가면 제대로 드시지는 못해도
"바깥세상에 이런 좋은 딸기가 나는 봄이구나" 오래 감성에 젖곤 하셨다.
스스로 택한 그녀의 남편은 동경 유학까지 한 좋은 배필이었지만 광복 후의 어수선한 시국에 일본을 오가던
사업으로 어느 해 연락이 끊어진다.
북송선에 얽힌 희망의 이야기를 편지에 썼던 마지막 기억으로 이모들은 그 알 수 없는 이별이 남북 비극 중의 하나라고 했던가. 그 탓에 나는 일본식 정원을 가진 외갓집에 자주 맡겨져 어린 이모들의 연애사에 딸려 다니던 마스코트 같은 역할이 되곤 했다.
그 후의 수십 년간 젊은 엄마의 상실감과 고달픈 세상살이는 말해 뭐 할까.
이른 여름 7월이었나
충남 서산 모월리 힐링 숲에서 나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수국 무리를 만났다.
일본 여행에선 간혹 봤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연륜 있는 푸른 송림을 배경으로 끼고 희고 푸르스럼한
여름빛을 마음껏 펼친 수국 정원을 보게 된 건 행운이었다.
나무 테크들이 사이에 갖추어져 쉼을 곁들여 가며 산책할 수도 있고 힐링 숲이라는 지명답게 그 어떤 것도
관람객을 괴롭히지 않는다.
개인 사유지라도 영역 주장을 하지 않는 이런 주인 분들이 많으면 좋을 것이다.
나무 테크에서 쉬다가 좋아하는 작업에 빠져있는 분을 바라 봤다.
팔순이 넘은 카메라엔 무엇이 담겨 갈까?
갑자기 다음번 엄마의 묘소에 어린 시절 함께 보던 그런 푸른 수국 한 다발을 가져다 보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