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선운사
어수선한 인간들의 세상살이 곁에서도 자연은 때되면 묵묵히 아름다운 제 역할을 보여 준다.
가을비를 걸어 찾아온 선운사 곳곳은 이미 감성 영화가 되고 있다. 꼭 10년 만인가?
퇴직과 외국으로의 이직을 고민하던 그즈음 나는 사찰을 구경하고 친한 동료들과 마지막 식사가 된
유명 장어집을 들러 갔었다.
물 흐르듯 10여 년이 흘러간 뒤 제대로의 꽃무릇을 다시 한번 보겠다고 이곳을 찾았다.
비속에 꽃들은 이미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선운사 경내를 가을비를 마다하지 않고 거닌다.
선운사 대웅전에는 부처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비로자나 불상이 중심이다.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갸름한 얼굴형이 일반 부처상과 달라 유심히 보게 되는데 사실 선운사의 명소는
기도의 효력이 소문났다는 도솔암 마애불이지만 나같이 좀 게으른 이는 번번이 본 사찰에만 머물다 간다.
오늘은 젊은 연인들이 많고 도솔암 올라가는 갈림길에 한옥 버전의 폴 바셋 매장이 붉은 꽃무리를
배경으로 들어선 것도 놀라운 변화다.
사랑도 꼭 그대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세대, 비 속에 꽃무릇을 보러 온 오늘 많은 연인들은
그저 다정해 보인다.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는 상사화나 한순간 사랑으로 대웅전 처마를 받드는
형벌을 받았다는 전등사 조각같은 원초적 이야기가 사원 곁에 만들어 지는 건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꽃무리에 얹혀진 한옥 카페의 자태가 너무나 산뜻 해 또 한 번의 꽃무릇이 필 때는 나도 그 그림 속에
앉아보기를 기약하며 붐비는 매장을 둘러 나왔다.
오늘 내리는 이 옅은 비 그치면 금세 가을은 깊어갈 것이다.
쉴 만큼 쉬고 놀만큼 놀았으니 가족에게 집중하려는 생각, 조금 남은 내 인생이 더 소중할 거라는 아쉬움?
이런 유치한 계산 하며 버스에 올랐는데 오래된 제자들의 추석명절 인사들이 연달아 뜬다.
"계산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