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호주를 처음 만난 시간

by 미경

나의 첫 해외 경험이자 해외에서 돈을 벌고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처음 경험하게 해 준 곳은 바로 호주였다. 가만있자, 나의 첫 비행기 탑승 경험 역시 이곳으로의 여정에 있을 것이다. 호주 이전에 제주도 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2008년 3월, 손에는 시드니행 편도 탑승권, 기억컨대 통장에는 겨우 150만 원 남짓을 들고 호주로 떠났다. 21년 1개월가량 나고 자란 땅에서 살아오는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평범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나는 평범한 아이로, 학생으로 단 1분도 살아 본 적이 없다. 남들이 뭐라 하던 상관없다며 명백하게 느껴지는 시선들을 억지로 외면하며 살아오던 나는, 드디어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로 아침마다 눈을 떴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이렇게 살다가는 물리적 자기 파괴 외에는 답이 없겠구나는 것을 깨닫고 살기 위해 호주로 갔다.


왜 호주였냐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하는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필요해야 했고 아주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한 곳이어야 했다. 현실적으로 비자를 받고 머무는 데에 큰돈이 들거나 특별한 조건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 당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호주뿐이었다.




동대문 시장 가방 상점에 가서 가장 크고 튼튼해 보이면서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빨간색 여행 캐리어를 샀다. 밥 굶지 않으려고 전기밥솥까지 챙기고 뭐 하나 빠뜨리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짐을 싸다 보니 캐리어 위에 올라앉아 내 몸의 무게로 사방을 눌러가며 지퍼를 채우지 않으면 캐리어가 절대 닫히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항에 가 짐을 부치려고 보니 23kg, 아마 20kg이 한도였을 테니 몇 킬로나 무게를 초과했을 텐데 케세이퍼시픽 직원은 단 한마디의 덧붙임도 없이 서둘러 내 짐을 부치고 탑승권을 주었다.


고추장이 액체로 분류된다는 걸 모르고, 부피에 부해 무거우니까 캐리어 무게 줄여보겠다고 백팩에 욱여넣었는데 검색대에서 바로 걸렸다. 정말 소중한 마음이 깃든 고추장이었는데 비행기도 함께 타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혼이 쏙 빠진 채로 경유지인 홍콩 공항에 도착했고 무슨 공항이 이리도 크던지, 길을 잃었다가 겨우 겨우 시드니행 탑승구로 달려갔다.




시드니에서는 다행히 한국에서의 상실과 슬픔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호주 땅에만 없을 뿐이지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누구도 내가 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나도 누군가의 영어를 알아듣는 데에 한 세월이 걸리던 그곳에서 나는 살 집을 구하고 할 일을 구했다. 나를 괴롭게 하던 것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다른 종류의 것들이 나를 괴롭게 하는 편이 훨씬 견딜만했다.


그렇게 견딜만한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새로운 것들도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도로에 일본 차가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물론 곳곳에 소니, 파나소닉과 함께 놓인 삼성, 엘지 티브이들을 보며 한국 제조업의 위상을 실감하기도 했지만, 그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 일본 차들은 '내가 사는 나라가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겪는 것을 결정할 수 있구나'라는 충격을 경험케 했고, 몇 날 며칠, 혹은 이후 몇 년이 넘도록 이 부분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하였다.




테이크 아웃 카페에서 같이 일을 하던 중국계 인도네시아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 인생의 큰 흐름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한국식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며, 거짓말로 도배된 이력서를 받고도 곧장 나한테 일하러 나와보라고 연락을 주었던 조키부터, 잘 생기고 다정해서 한 때 좋아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던 핸드라, 시크한 듯 하지만 내 수다를 가장 잘 들어주었던 조니, 또랑또랑한 눈빛과 생기 있는 표정이 이름에 꼭 걸맞던 스패로우, 언니라는 말을 어디서 배워왔는지 언니라고 부르며 똑 부러지게 할 말을 잘하던 한 살 동생 벨라,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꼭 자기를 초대하라던 안젤라까지 나의 첫 외국인 친구들이자, '카푸치노', '라테' 외에는 손님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나의 실시간 통역사가 되어 주었던 소중한 동료들은 모두 자기가 나고 자란 인도네시아를 떠나 호주에서 지내며 영주권을 따기 위한 노력으로 온 젊음을 바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친척 혹은 인도네시아에서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었는데, 듣자 하니,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 돈을 벌고 사업을 하는데 능하다 보니 비중국계, 말하자면 그 땅에 중국인들이 넘어오기 전부터 살고 있던 인도네시아인들이 중국계를 싫어하게 되고 심지어는 가게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함께 안전한 나라 호주로 건너와 영주권을 따는 데에 좋다는 직업들인 미용사 혹은 회계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며 일하고 있었다.


막 대학 공부의 절반을 마치고 휴학해 새로운 세상에서 한숨 돌려보고 오겠다고 비행기에 오른 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고민이었고,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꿈을 꾸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청춘의 꿀이 뚝뚝 떨어지는 고민을 하던 나에게 생명의 위협이라는 차원이 다른 주제로 씨름하던 동년배의 젊은이들의 모습은 '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나의 삶은 이 잘못된 것을 고치는데 기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며 안 된다'는 되뇜을 오래도록 하게 만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