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내가 좋은 시간을 보냈던 호주에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게 맞지만 있는 동안 영어를 늘려서 나중에 어떻게든 써먹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써야 하는데, 대만 모녀 집과 호스텔을 비교했을 때 호스텔에서 만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고 분위기 자체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며 쉽게 친구가 되는 것이었기에, 조용하게 쉬며 지낼 수 있는 대만 모녀집보다는 확실히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3일 예약한 호스텔을 일주일 정도 더 연장했다. 집은 일단 계속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고 호스텔 근처에 있는 집을 한 군데 더 보고 오기도 했다.
호스텔 주방은 마치 요리학원을 방불케 하듯 어마어마했는데, 끊임없이 늘어선 조리대와 싱크대,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냉장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요리를 해서 먹고 사는지 잘 보여주었다. 쌀을 사 왔는데 밥솥 없이 밥을 할 줄 몰랐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감이 잘 안 왔는데, 맞은편에 나보다 나이 있어 보이는 동양인 여성이 각종 재료를 늘어놓고 야무지게 요리하고 있었다. 밥 어떻게 짓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고 말을 걸었다가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 일본에서 왔다.
놀랍게도 에리는 이 호스텔에 10년이 넘게 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보험회사에서 일했지만 호주에서 요리를 공부해 지금은 브리즈번 뮤지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하는 요리사이고 수년 전에 호주 영주권을 취득했다고 한다. 처음 호주에 온 건 10년여 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통해서였고,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시아를 오래 여행하며 지냈다고 했다. 그러다가 호주로 돌아와서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사 직업을 가지면서 영주권까지 취득해 이제는 호주에 비자 걱정 없이 평생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호주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은 없고 10년쯤 뒤에는 일본에 있는 가족들, 특히 연로하신 어머니 곁에 지내고 싶어 일본에 돌아갈 생각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10년을 연이어서 지낸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나 일본에 다녀올 때는 얼마간 나가기도 했지만, 지난 10년 간 대부분의 시간을 이 호스텔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셰어하우스를 구해 나가려고 생각도 하고 노력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보증금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의욕을 잃어 그 노력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대신, 지금은 혼자 지낼 수 있는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사서 지내려는 계획을 하고 있고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에리는 지금은 장기 체류자 특별 할인 같은 것을 받아 호스텔 독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예전에는 다인실 이층 침대방에서 지내며 룸메이트들과 굉장히 가깝게 지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나가서 살 셰어하우스를 구하고 있다는 나의 말에, 에리는 벤자민보다 더 강력하게, 또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호스텔에 사는 것을 권유했다. 에리가 말하길, 만약 내가 셰어하우스를 가면 집 안에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제한될 테고,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집 바깥에서 친구들을 사귀어야 할 텐데, 이 호스텔에 살면 그냥 이곳에 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게 되니 따로 그 점에서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또 확실히 영어는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 할 때 는다고, 자신의 영어가 가장 많이는 시기가 호주가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였다고 한다. 자기가 몇 달 뒤 집을 사서 나가기 전까지 자기와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이곳이 최적의 공간이라고 했다.
그렇게 에리의 말에 완전히 설득당해 집을 구하지 않고 호스텔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룸메이트 벤자민과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에리와도 한 번씩 주방에서 많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 들 외 다른 호스텔에 사는 이들과도 점점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잠이 안 와 인스타그램 앱을 열어 팔로우하던 서핑 관련 계정 사진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한국에 있을 때 다른 서퍼 친구들에게 들어보았던 '누사'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호주 누사 지역의 파도는 힘이 좋지만 크기가 크지 않고, 기울기가 완만하면서 거칠게 휘몰아치지 않아 9피트 이상의 긴 서핑보드에 올라 타 파도를 유유자적하게 즐기기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 '누사', '누사 서핑' 등을 검색하여 보았고, 재미있는 게시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게시글은 '누사 서핑 페스티벌'이라는 계정에서 업로드한 것인데, 곧 누사에 누사 서핑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서핑 대회가 열릴 것이고 대회장에서 자원 봉사할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 지원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지원 모집 마감 날짜를 확인했는데, 그때가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으니까, 핸드폰을 들고 있던 그 당일에 지원 마감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누사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 대략적인 위치 확인만 하고 바로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누사는 브리즈번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한참 더 걸릴 터였다. 페스티벌은 이 주간, 두 번의 주말을 끼고 진행되었다. 이박삼일의 일정은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해 봉사활동을 하고 오기엔 너무 짧다고 느껴졌고, 첫 번째 주말을 낀 삼박사일, 목요일 오후에 가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정하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학교는 목요일 수업 마지막 한 시간과 금요일 수업 전체를 빠지게 되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서핑과 관련된 페스티벌을, 그것도 말로만 듣던 호주 서핑 천국 누사에서 진행되는 것을, 봉사활동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소통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결정에 아쉬움이 없었다.
그렇게 등록한 6주의 영어 과정 중 절반을 마쳤을 즈음의 어느 목요일 오후, 나는 호주의 고속버스인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누사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