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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Mar 23. 2024

매화나무 샘

             

전남 구례군에 있는 유명한 사찰, 지리산 화엄사의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사람들이 북적인다. 이 매화나무는 홍매(紅梅)인데 색깔이 짙어 검붉은 색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흑매(黑梅)라고 부른다고 한다. 때마침 지난 1월 24일에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됐다고 한다. 화엄사에는 원래 천연기념물인 매화나무가 따로 있었다. 화엄사 북동쪽에 있는 암자인, 모과나무 기둥이 유명한 구층암에 붙어있는 작은 암자인 길상암의 매화나무가 그것이다. 이 매화나무는 야생 매화나무로 수령이 450년이 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거의 10년 전인 2015년이다. 야생 매화인 까닭에 꽃잎이 작지만 향기가 개량종 매화나무와 비교가 어렵다고 하는데 아직 꽃이 덜 피어서인지 흑매만큼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와중에 화엄사 각황전 옆에 있는 홍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사찰 측에서도 사진 콘테스트를 한다고 해서 많은 사진사들도 몰려들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몰려드는 까닭에 고즈넉하게 매화 사진을 찍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찰나의 순간을 노리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는가 보다.          

구례에는 ‘매화나무 샘’이란 이름의 사당이 있다. 바로 매천사(梅泉祠)다. ‘매천’이란 호를 가진 조선 말기의 선비이며, 시인, 역사학자, 애국지사인 황현(黃玹) 선생의 집터에 뜻있는 유림과 후손이 세운 사당이다. 매천 선생은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30대에 구례로 옮겨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셨다. 내가 그 매천 선생에게 알게 모르게 진 빚이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래의 3가지다.           

매천 선생은 개인적으로 『매천야록』이라는 편년체 역사서를 썼는데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주관적 관점에서 쓴 책이다. 이 책 속에 진주의 기생인 산홍(山紅)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외모와 가무가 뛰어난 진주 기생이다. 1906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인 이지용이 내부대신(현 내무부장관)으로 진주에 왔을 때 이지용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많은 돈을 내놓으며 자신의 첩이 돼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비천한 기녀지만 사람일진대 어떻게 매국노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단번에 거절했고, 무안을 당한 이지용이 크게 화를 내며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이지용의 채근에 못 이겨 자결을 했다고 전해진다.      

산홍의 이야기는 매천 선생의 기록과 이를 인용한 「대한매일신보」에 의해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으며, 급기야 사람들에 의해 촉석루에서 의암(바위)으로 내려가는 절벽 바위에 山紅(산홍)이란 두 글자로 새겨졌다. 진주시에 그녀의 뜻을 잇는 한 ‘셰프’에 의해 그녀의 이름 산홍을 딴 냉면 전문점이 생겨나면서 그 식당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진주시민으로서 진 첫 번째 빚이다.          

두 번째는 조선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입신양명과 자기 혼자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출세길로 몰려가던 그즈음에 매천 선생은 단호하게 관직으로의 길을 포기하고 선비와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의대나 법대를 포기한 것과 같은 셈이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광분하여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제 한 몸의 영화와 출세만을 위한다는 뜻)을 추구할 때 그와 같은 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유학)과 문학(시)과 역사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뜻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진 빚이다.          

세 번째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섰을 때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여 순국한 것이다. 유서에서 선생은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이나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하늘로부터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는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나무위키에서 재인용)”라고 하면서 자신의 길로 갔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이제는 국가나 사회의 중요도와 함께 개인도 같이 중요시하지만, 그때처럼 여전히 혼탁한 오늘날에도 그의 분기(憤氣)를 보면서 어찌해야 하는가 하고 느끼는 바가 크다. 이것이 국민으로 느끼는 또 다른 빚이다.          

마침 매천사가 공사 중에 있고, 휴일이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사당과 기념관을 보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분향하며 선생을 그려본다. 그래서 그런지 화엄사의 흑매는 올해도 더 붉고, 검고, 향내가 좋았다. 흑매를 보러 많은 사람이 오고 있는데 ‘매화나무 샘’에도 들려 선생의 뜻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화엄사 흑매 옆에 있는 각황전 전각에라도 들려 세 분 부처님과 네 분 보살님들의 가피를 빌어 우리 사회와 나라와 인류가 좀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온 생명과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기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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