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자 셋의 프라하에서 2주 살기
현지 시간 오후 다섯 시에 도착해서 한인 민박에 짐을 풀고 까를교 산책을 나간다.
몹시 피곤하지만 대낮 같은 프라하의 저녁을 그냥 보낼 수 없다.
나이 드니 열한 시간의 긴 비행은 정말 힘들다.
게다가 한국시간은 밤 열두 시.. 나는 지금 자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첫날은 이런저런 정보들이 중요하니 현지 민박에서 지내고 내일부터 12일 동안 렌트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한인 민박의 위치는 아주 좋다. 트램을 탈 필요도 없거니와 올드 타운과 아주 가깝고 근처에 큰 마트도 있다.
다만 위치가 좋은 까닭에 소음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1박만 하고 가기를 잘했다.
자, 천천히 까를교로 가보자.
카를교를 향하여 걷는 동안 우리의 눈은 매우 바빴다.
동유럽의 진수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프라하의 건물들.. 그리고 카를교.
거리의 연주자들, 하늘에 떠 있는 벌룬, 강 물에 출렁이는 석양..
프라하와 우리는 오늘부터 1일이다.
오늘은 오전에 페트라진 언덕을 오르고, 하벨 전통시장과 천문 시계탑, 구시가 광장을 걸어 다닐 예정이다.
그리고 저녁엔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에서 인형극으로 '돈 지오반니'를 보기로 했다.
프라하의 여름 낮은 한국보다 훨씬 더 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한다.
신나서 너무 걸어 다녔더니 제니, 지나와 나는 거의 기진맥진이다.
세시엔 렌트한 아파트 주인과 만나기로 했으니 빨리 찾아가야 한다.
구글 검색을 해서 왔지만 결론적으로는 엄청 헤매다 겨우 겨우 찾아왔다.
너무 더워 잠시 어지럼증까지 온 나는.. 여기가 어딘가.. 싶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아파트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갖춰져 있고 인테리어도 어쩜 이리 예술적인가.
하루에 두 번 샤워는 기본인 프라하의 뜨거운 여름..
샤워를 하고 <돈 지오반니>를 보러 나간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가도 두어 시간 쉬고 나면 다시 힘이 생기는, 나이에 맞지 않는 기이한 현상은 여행이라는 진통제의 힘인가 보다.
평소의 나라면 쉬다가 아예 포기하고 누워버릴 텐데 말이다.
마리오네트 국립극장 찾느라 저녁도 못 먹고 계속 걸어 다녔다.
프라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국립극장은 알아도 마리오네트 국립극장은 모른단다.
결국 돌다 돌다 극적으로 찾은 극장..
극장 찾다 기운이 다 빠져 버려 돈 지오반니 인형극을 보다 결국 꾸벅꾸벅 졸았다.
굳이 안 봐도 되었을 인형극을 뭐하러 기를 쓰고 보러 갔을까.
"국립극장"이란 단어에 현혹되어 그렇다.
이누무 브랜드 좋아하는 허세.. 빨리 버려야 할 텐데 말이야.
오늘 아침 국물이 먹고 싶었던 우리는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아파트 곳곳에 향초가 많아서 음식냄새도 없앨 겸 유럽 분위기도 낼 겸 양초를 켰다.
다 끓여진 라면 냄비를 식탁에 올리는데 갑자기 가슴께가 따뜻하다.
라면의 뜨거운 김 때문인가? 하고 봤더니 가슴 근처에 불이 붙어 있다.
갑자기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나..
'어? 왜 내 가슴에 불이 붙었지?' 라며 불을 끄려고 후후 부니 어라.. 불이 점점 올라온다.
두 손으로 원피스 가슴 바깥쪽을 벙벙하게 잡고 계속 후후 부니 불이 점점 얼굴쪽으로 올라오며 세진다.
옆에 있던 제니가 너무 놀라 나를 얼른 싱크대로 잡아끌며 물을 뿌렸다. 그제야 꺼지는 불..
다행히 살갗엔 불이 닿지 않아 나의 가슴엔 상처가 없지만 내 가슴은 이미 뻥 뚫렸네.
이 상황이 너무 웃겨 제니와 지나, 나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다.
타 죽을 뻔했는데 뭐가 그리 웃기는지. 다 웃고 나서 구멍 뚫린 내 잠옷을 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진짜 하느님이 보살피신 것 같다.
뻥 뚫린 가슴의 나는야, 아이언 문!
오늘은 일요일..
1. 벼룩시장 구경하기
2. '레트나 파크' 나무 그늘에서 책 읽으며 쉬기 ( 유럽사람들처럼)
3. 구시가 광장 야경을 보며 늦은 저녁 먹기 (물론 유럽사람들처럼)
일요일에만 열린다는 벼룩시장 정보는 내가 가져간 책에 나온 것이다.
내가 산 최신간보다 학교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더 자세한 것 같아 가져왔다.
지하철 A선을 타고 드뷔체니크역에서 내리면 역 주변에서 벼룩시장이 선다고 적혀있는데 가서 보니.. 없다.
이런 상황에 '헐!' 보다 더 내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헐!!!
벼룩시장은 이미 없어졌다.
7년 전에 나온 여행 책을 갖고 온 내 잘못이다.
36도의 작렬하는 태양..
멘붕으로 더 뜨거워진 내 머리.. 아니, 그 보다 제니와 지나 두 언니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 얼굴은 벌겋게 팽창한다. 벼룩시장은 실패했으니 여기서 가까운 '비자시장'으로 목적지를 변경한다. 책에 비자시장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간다. 동유럽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상상 이상으로 가파른 높이에 그 속도감이 대단하다. 에스컬레이터 타며 다리가 후덜거리기는 처음이다. 밖으로 나오니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헥헥 거리며 방향도 모르고 걷다 앞을 보니 아주 오래된 성당이 보인다.
우리, 성당에서 좀 쉬었다 가요~
마침 성당에서 나오시는 관리인에게 '비자 시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그 시장은 없어졌다며 유창한 체코 말로 답하시네.
우린 체코 말은 몰라도 희한하게 의미는 다 이해하는 아줌마 센스가 있다.
아무튼 또 실패다.
책만 믿고 내가 가자고 했는데..
두 언니들에게 미안함의 쓰나미가 온몸을 휘감는다.
역시 여행책은 최신본이 최고다. 젠장..
원래 계획은 레트나 파크에서 그냥 쉬기였으니 실망할 것 없다며 다독여주는 제니와 지나.. 이런, 더 미안하다.
성당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며 그래도 오늘 이 순간 여기에 올 수 있음에 깊은 감동이 일었다.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조용히 앉아 침묵에 잠긴다.
해는 밤 9시가 넘어야 진다.
구시가 광장 천문 시계탑에 올라가서 본 프라하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한번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체코는 맥주와 커피가 특히 맛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필스너 우르켈과 흑맥주, 벨벳 맥주 등은 체코의 자랑이다.
스테이크와 맥주를 앞에 놓고 프라하의 밤과 마주한다.
아름다운 프라하에서의 밤은 이렇게 저물어간다..
내일은 어디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