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불안, 인싸, 소설) 에세이 by 믹서
퇴사 결심이 섰을 때마저, 나는 흔들렸다. 자본주의 사회에 매우 성실한 소비자로 지냈던 터다. 매달 나가야 할 카드 값은 정해져 있다. '월급 없이 과연 살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을 외면하게 했고, 퇴사는 자꾸 미뤄졌다.
그래도 난 기어코 퇴사를 했다. 불안을 껴안고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갖다 댈 이유는 많았다. ‘이젠 내 사업을 해 보고 싶다’, ‘회사 인간 10년이면 족하다’, ‘컨펌받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다’, ‘번아웃이 왔으니 좀 쉬어야 한다’ 등등. 그런데 퇴사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새로운 진실을 발견했다.
‘아! 나는 '인싸'가 되고 싶었던 거로구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목사들의 설교나 글, 교회 관계자, 기독교 회사 관련 내용의 피드를 주로 봤었다. 그러다, 3년 정도 기독 언론사에서 일하며 교회의 각종 부패과 비리,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시각에 넌더리가 났다. 퇴사 후 페이스북 팔로우를 정리하면서 교회 관련 피드는 확실히 줄었다.
반면, 내가 선망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멋진 창업가들, 여성 리더들,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유튜버들, 그들이 주관하는 힙한 행사들이 내 SNS를 점령했다. 세상의 인싸들이 내 우상이었고, 그들의 스토리가 내 세상이었다. ‘반드시 사업에 성공해서, 영향력 있는 인싸가 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불안마저 잠식해 버렸다. 하루 종일 일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고, 그간 소홀했던 인스타그램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일과 관련된 콘텐츠에 집중하다 보니,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갔다. 내겐 너무 힙한 행사이기도 했고, 동경하던 인싸들이 많이 출몰한다기에 부랴부랴 갔다. 도서전은 만원이었다. 입장하려면 족히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역시 힙한 사람들 다 모였군!’ 하는 생각에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힘들지 않았다.
도서전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끈 건, 이번에 신간 소설 <진이, 지니>를 낸 정유정 작가였다. 많은 독서가들의 사랑을 받는 정유정 작가 역시 내 선망의 대상, ‘인싸’였다. 사인회가 열린 곳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딱히 그 책을 살 계획은 없었는데, 정 작가와 악수하고 사진 찍고 싶은 마음에 날름 책을 사고 줄을 섰다. 그런데 아뿔싸! 딱 내 앞에서 사인회 참가 정원이 마감된 것이다.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흥! 인싸와 사진 한 방 찍는 거, 참 되게 어렵네!’ 하는 마음에 심술이 나기도 했다.
크게 마음에 없던 책 <진이, 지니>는, 사인회에서 누락되어 침울해진 마음 때문에 찬밥이 됐다. 책꽂이에 덜렁 꼽힌 후, 한 달 가까이 지나고서야 첫 페이지가 열렸다.
시작부터 꽤 박진감 넘치는 속도에 빨려 들어갔다. 유인원 사육사 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보노보 진이와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스토리였다. 절박한 상황,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떤 선택이 생을 가장 빛나게 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 깨달았다. 삶과 죽음의 숭고함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책을 덮고 엉엉 울어버렸다. 갑자기 마주한 인생의 커다란 물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란 질문 앞에서 나는 모든 불안이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하는 중이다. 난 왜 그렇게 인싸를 동경해 왔던 걸까. 그것의 최종 목표는? 내가 하려던 일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들 앞에 서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긴 여행이지'라고 늘 농담처럼 말했었는데, 바로 그 ‘롱 저니(long journey)’가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notice
유유히유영은 유자까, 믹서, 멸종각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최근 세 작가는 한 주에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약 1시간 반) 같이 글쓰기를 합니다. 무작위로 적은 16개 단어 중 3개를 뽑아 관련 글을 작성해요. 형식은 자유입니다.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만, 각자 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기에 다양한 글이 나옵니다. 앞으로 매주 키워드 단편집에 이날 쓴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이번 키워드는 '불안', '인싸', '소설'입니다. 일로 인정받기에 자기를 모두 갈아 넣어 왔던 작가 '믹서'의 에세이가 첫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