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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의 나라를 봤고, 이제 당신에게 보여드립니다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와 잭 케루악의 시선

by JI SO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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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열정적으로 공부하던 시절, 1~2주에 한 번쯤, 책을 파는 보따리장수가 학교에 들렀습니다. 그는 좌판을 펼쳐놓고, 학생들에게 사진집과 예술책을 팔았습니다.


사진이나 예술에 관련된 책이 부족했던 때라 나는 단골이 되었고, 아저씨가 올 때마다 책을 샀습니다.

할부로도 샀고 현금을 주고 사기도 했는데, 그 시절의 할부는 어쩌면 인간적 믿음이 바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할부 값을 다 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때 산 책 중의 한 권이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입니다. 아마도 8~90년대에, 사진을 공부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이 책은 사진의 영원한 교본으로 통했고, 로버트 프랭크를 사진의 삼촌쯤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방학을 하면 필름 50 롤 소모하기 내기를 하며 로버트 프랭크 따라 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50 롤이면 36컷 기준, 약 1,800컷 정도로 적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하면, 우리 국내 작가 중에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정진과 이갑철 작가입니다. 이정진은 로버트 프랭크의 마지막 제자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갑철은 로버트 프랭크를 가장 잘 따라한 작가입니다. 두 사람 모두, 로버트 프랭크를 통해 자기만의 사진 세계를 구축하여 성공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런 작가를 파리의 전시장에서 만났습니다. 책으로만 봤던 그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유려한 문체의 잭캐루악의 서문은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글을 사전을 뒤적이면서 번역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세상은 말없이 흘러갑니다. 끝없이 이어진 미국의 도로 위를 따라, 조용한 기차역과 외로운 카페 창가를 지나며,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장면들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상의 조각을 조용히, 깊이 있게 바라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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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프랭크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 이게도, 그는 번영하는 미국의 상징이나 유명 인사가 아니라, 평범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렌즈에 담았습니다. 눈에 띄는 화려함보다는, 눈길이 머물지 않는 그늘과 침묵 속의 감정에 집중했지요. 그렇게 모인 사진들이 바로 사진집 『The Americans』(미국인들)입니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미국’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집의 첫 장을 넘기면, 우리를 반겨주는 인물은 바로 잭 케루악입니다. 『길 위에서(On the Road)』로 유명한 작가이며, 방랑과 자유를 노래한 비트 세대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지요.

잭 케루악은 『The Americans』의 미국판 서문을 맡았습니다. 그는 프랭크의 사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당신의 나라를 봤고, 이제 당신에게 보여드립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의 시처럼 읽힙니다. 케루악은 프랭크의 사진 속에서 진짜 미국, 숨겨진 미국, 그리고 보려 하지 않았던 미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진실을 독자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가 본 사진 속 미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트롤리 창밖으로 흑인과 백인이 나뉘어 앉아 있는 장면, 군복을 입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병사의 표정, 허름한 카페 안에 앉은 사람들의 공허한 눈빛. 그것들은 결코 설명되지 않지만,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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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루악은 프랭크의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진들은 마치 재즈처럼 자유롭고, 흐릿한 순간들 속에서 삶의 본질을 건드린다고요. 그는 프랭크의 렌즈를 통해 이 나라가 가진 이면을 바라봤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이 사진집은 당시로서는 너무 파격적이었습니다. 너무 어둡고, 너무 직설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도 많았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압니다. 프랭크의 사진이 보여주는 건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이었다는 것을요.


잭 케루악은 프랭크의 사진에 문장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는 비평가가 아닌 친구처럼, 혹은 같은 시대를 떠돌던 동지처럼 프랭크의 사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서문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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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mericans』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며, 하나의 시입니다. 프랭크가 사진으로 써 내려간 이 시를, 케루악은 말로 옮겼고, 우리는 그 둘의 시선을 통해 이 나라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이 알고 있던 미국은 정말 당신의 것이었습니까?”
“당신은 이 나라를, 이 사람들을, 이 풍경을 제대로 본 적이 있나요?”


프랭크는 조용히 사진을 찍었고, 케루악은 그 침묵 속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 세상은 지금도 유효하며, 어쩌면 더 절실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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