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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말

나를 위한 시간의 질문들 16

by JI SOOOP

결국은 사진으로 다시 돌아온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무슨 얘길 하더라도 결국 사진 이야기로 귀결되더란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무섭다. 내재된 습관이란 것이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오로지 사진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청춘의 날들이 있었다.


처음 카메라를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작은 사각 프레임 속에 세상을 가두어두는 일은,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외부의 세상을 훔쳐보던 기억과 닮아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돌멩이, 길가에 들꽃, 심지어 흙먼지 자욱한 길가의 풍경조차도, 렌즈를 통과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그 사소한 변화를 사랑했고, 그때부터 ‘사진의 언어’가 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늘 말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가장 큰 목소리를 가졌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순간에도 사진은 묵묵히 있었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포착하고, 지나가는 순간을 붙들어내며, 오래도록 기억을 보존하는 일. 그것이 내가 사진을 사랑했던 이유였다. 그래서였을까, 글을 쓰려하면 어느새 사진의 장면들을 불러오곤 했다.


사진은 언제나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늘 그 자리에 존재해야 했다. 빛이 닿는 방향을, 그림자가 드리우는 깊이를,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의 결을 감각해야만 했다.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내가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결국 사진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증명하는 ‘말’이었다.


물론 사진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그것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웃던 얼굴을 찍어놓고,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사진은 말 없는 칼날이 되어 가슴을 베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은 위로였다. 그 순간이 진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는 기록이었으니까. 사진의 양면성 속에서 나는 ‘기억’과 ‘망각’을 오가며, 인간이란 결국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KakaoTalk_20250819_101130037.jpg 어둠의 정원 1999 _ 지성배

글은 순간을 붙잡을 수 없다. 글은 해석과 설명을 거쳐야만 의미가 생긴다. 하지만 사진은 다르다.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 손끝의 떨림 하나로 모든 것을 전한다. 그렇다고 사진이 글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진이 감각의 언어라면, 글은 사유의 언어다. 나는 글을 통해 사진을 해석하고, 사진을 통해 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제 나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카메라를 붙잡고 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다 보면, 또다시 사진을 불러내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사진이 내 몸 깊숙이 새겨진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말을 통해, 누군가는 음악을 통해 자신을 설명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였다.


어쩌면 내가 쓰는 글도, 결국은 사진의 연장일지 모른다. 문장 하나하나가 셔터 소리처럼 내 마음을 울리고, 단어 하나하나가 프레임 속의 빛처럼 의미를 만들어낸다. 글을 쓴다는 건 사진을 찍듯, 순간을 잡아채는 행위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의 말’을 믿는다. 말하지 않아도, 글로 풀어내지 않아도, 사진은 언제나 내 대신 세상을 이야기해 왔다.


결국은 사진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자 내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언어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쓰면서, 또다시 사진을 떠올린다. 셔터를 누르듯 문장을 이어가며, 순간의 숨결을 붙들어두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이 글을 읽을 때, 사진처럼 또렷한 장면 하나가 그들의 마음에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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