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간의 질문들 14
엊그제 첫사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 5년 만이다.
첫사랑,
우리는 고교 2학년 때(그녀는 1학년) 만났고, 내가 군대를 간 후 헤어졌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났다.
그때, 첫 느낌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였다.
스무 살 치기 어린 사랑의 절실함이 없었고, 우린 이미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 우습게도 우린 둘 다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려고 했던 나는 사진작가가 되었고,
글하고는 너무 멀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우린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그녀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나의 전시 오프닝에 찾아와 주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그간 써 온 글들을 돌려 읽으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몇 번의 왕래가 있고 나서, 흐물흐물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전 전화가 온 것이다.
"지금도 소설 잘 쓰고 있어?"
"응, 그럭저럭."
뭔지 모를 어색함에 아무 얘기나 내뱉었다.
"그래, 한 번 봐야지."
"그래 그래, 담에 한 번 봐."
전화를 끊고 나서 오래도록 완성하지 못한 소설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의욕이 돼 솟았다.
석 달 전이다. 나는 안개 속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마을 이장은 안개가 걷히길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밤안개에 무척이나 고무된 채 이장을 재촉했다.
"긍께. 어렵당께. 좀 기둘려 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못 참는거여덜... 아척이나 되고 보잔께. 그 할매도 귀가 멀어서 밤에는 구신씻나락까먹는 소리밖에는 못혀야. 잔소리말고 오늘 밤은 여그서 자고 아척 나절에 만내보자고 잉.“
이장은 마을 회관의 방 하나를 내주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찬은 없어도 막걸리 한 잔 할랑가. 용키도 허네. 젊은 사람이 이런 일을 자초하고 있으니 보기는 좋네만 멋에 쓴당까. 사실 말이지 자네 말고도 여럿이 다녀갔제. 무신 연구소에서도 나오고 그랬응께. 근디 그게 다 먼 소용이단가. 아무 소용 없더랑께. 글고 다 지난 세월인디. 인자는 다 잊어뿌렀제. 잊어뿔라고 하제. 근다고 죽은 혼들이 살아난당가.“
역사는 누군가가 자초해 놓은 일들의 연속이다. 자초된 일들은 그러나, 쓰여지지 않고 어딘가 숨어서 곰팡이를 피우다 녹슬어 간다. 녹슬은 때를 벗기는 일을 또한 누군가가 자초하리라. 숨겨진 과거는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채 몸을 뒤집는 것이다. 반쯤 익혀진 삼겹살을 뒤집듯... 때문에 진실은 고기의 살점이 노릇하게 익어가다가 뒤집지 않으면 마침내 검게 타고 마는 것과 같다. 은폐되다가 드러나지만 곧 새까만 절망으로 바뀌어 가는 것. 절망의 점철, 그렇다. 역사는 철저한 오기誤記다.
"뭐혀. 한 잔 받으랑께. 이 마을은 말여. 참으로 기가 막힌 곳이여. 그때 아매도 한 칠 십여호가 살았응께 그 당시에 꽤나 큰 마을였제. 근디 단 두 채만 남기고 다 불타부렀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당께. 그 때 나는 에래갔고 기억은 못허지만 들은 것은 많제. 글고 나도 피해자니께.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아직꺼정 이장을 하고 있지만, 난리통에 이장은 다 죽어나갔어. 그땜시 지금꺼정도 이장허기를 꺼려허제. 인자사 멀 두려워 헐 일도 없지만서도 세월이 지나도 아픔은 남는 벱이니께. 이런 꼴착에 누가 살라덩가. 다 떠나고 말제. 자네가 찾는 강할매 말여. 그 할매 남편이 면장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제. 회관 뒤로 나가믄 아래로 쭉 내리가서 당산나무가 있제. 여그 올라올 때 본 큰 당산나무 말이여. 그 당산나무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가믄 오동나무가 있는 기와집이 있어. 옛날에는 그래도 떵떵거리던 가세였는디. 구신처럼 혼자서 아직도 폭싹 무너진 집을 지키고 살아 있어. 참으로 모진 인생이시. 인자는 그 세월을 기억할 사람도 없다네. 강할매밖에는 말이여. 하나 둘씩 다 떠나갔제. 가슴에 한을 품고 말이여. 한때는 우리도 그랬응께. 그때 억울허게 죽은 혼들이나 달래주자고 그래야 후손 대대로 쬐금이라도 다리 뻗고 살꺼 아니냐구 말이여. 근디 탄원이고 뭐고 올라가믄 종종 무소식이여. 뭐 선거때나 되믄 표나 받을라고 얼굴이나 내비치지. 얼씬도 안혀. 세상 천지에 한 마을이 이렇게 몰살을 당허고 마을 전체가 다 불타버렸는디도 그것은 기냥 우리덜 가슴앓이 뿐이 아니더구만. 군사정권시절엔 아마 이런 소리조차 못했응께. 그래도 나아진 세상이라고 떠들어 쌓는디. 말로는 뭘 못혀. 씨부럴 세상이지. 우리가 얼매나 서럽고 어렵게 컸는디. 혹 정권이 바뀌믄 먼가 달라지겠지허고 기댈하기도 했제. 근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만 고것이 더 무섭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