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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흔적을 예술로 담아내다

앨리슨 로시터 Allison Rossiter

by JI SOOOP

Allison Rossiter : 시간의 흔적을 예술로 담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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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로시터(Allison Rossiter)는 현대 사진 예술가로, 사진의 전통적 개념을 재구성하는 독창적인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예술 세계는 오래된 인화지 작업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를 통해 시간, 기억, 그리고 역사에 대한 탐구를 시도합니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사진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새로운 차원의 미학적 경험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Rossiter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은 만료된 인화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20세기 초부터 중반에 제조된 인화지를 수집하여, 이를 직접 현상하고 작업에 활용합니다. 이 인화지는 대부분 정확한 유통기한이 지난 것으로, 보관 상태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겪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인화지를 단순한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낸 고유한 질감을 작품에 통합함으로써, Rossiter는 시간의 흔적을 하나의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킵니다.


Rossiter의 작업 과정은 매우 직관적이며, 과거 사진 예술에서 흔히 강조되던 기술적 완성도나 재현성보다는 재료의 내재적 특성과 우연성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인화지를 카메라 없이 암실에서 직접 처리하여, 다양한 모양과 패턴을 생성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빛, 화학약품, 그리고 시간의 작용이 혼합되어 독특한 추상적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흔적과 시간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위의 작품은 Rossiter의 작품 중 하나로, 오래된 인화지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흑백의 추상적인 구성을 넘어,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 자연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풍경처럼 보입니다. 작품의 상단에는 밝은 부분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점진적으로 짙은 어둠이 드리워집니다. 이는 산등성이나 언덕 같은 지형적 요소를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관객의 내면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풍경사진이 아닙니다. 작품은 구체적인 현실을 담기보다는, 시간과 물질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흔적을 예술적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Rossiter의 이러한 작업은 사진 매체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진은 현실을 정확히 기록하는 도구로 간주되었으나, 그녀는 사진을 시간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추상적 매체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카메라라는 도구 없이도 사진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진 매체가 가지는 잠재력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또한, Rossiter는 작품을 통해 시간이라는 보편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며, 관객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술과 역사 사이의 연결성을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Allison Rossiter의 예술 세계는 단순히 오래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이 재료가 가진 시간적, 역사적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예술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물질적 흔적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Rossiter는 사진 예술의 경계를 확장함과 동시에, 예술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여수 예울마루 장도라는 섬에서 레지던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섬에 작가 몇 명만이 거주하며 작업했습니다. 그곳에서 앨리슨 로스터를 만났습니다. 사진의 물성과 재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할 때 였습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받고 하는 과정에서 로시터의 작업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단조로운 인화지 한 장으로 무수한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이후 저는 필름 대신에 인화지를 가지고 촬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유효기간이 한참이나 지난 필름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사진 작업은 통상적으로 프리비주얼리제이션(Previsualization)에 기반을 둡니다. 즉, 촬영에서부터 현상을 거쳐 인화까지 미리 예측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사진들, 폐기 처분을 기다리는 필름들에게서 어떤 장면이 새겨져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장도 스튜디오에서 푸른 새벽마다 곁에 두었던 존 버거John Burger의 책들과 앨리슨 로시터Allison Rossiter의 사진들이 제 자신을 위로하고 부추겼습니다. 섬과 바다와 해와 달과… 그것들이 어울려 자아낸 ‘어떤 날들Some Days’이 있었습니다. 예측을 고이 접어두고서 내 안의 뭉쳐진 열망을 끄집어낸 작업들이 예술의 찬란한 정글 속으로 사정없이 내던져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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