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만 벌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타인을 '이해한다/알고 있다'라는 말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색의 이해는 '대상을 향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상상'에 가까울 테지.
같은 사고를 겪고 큰 고통을 함께 겪은 가족이나 형제조차도 저마다 다른 모양의 어려움과 잔재를 갖고 있다. 하물며 수십 년의 인생에서 한 때를 나눈 타인에겐 당연한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데이터를 뇌에 입력해서 시뮬레이션해보고 상상해보며 이해를 흉내 내며 대할 뿐. 그러니까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게 오히려 더 당연한 이치다.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누군가는 내게 '그건 너무 안드로이드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 역시 기계보다 오차 범위가 큰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상처를 주며 실망을 준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내 잘못과 오류의 범위를 생각해보면, 진짜 악당은 아니었던 주변인의 악의 없는 잘못과 오류에 역설적이게도 조금 자유로워진다. 기존에 내게 육체적/정신적으로 명백한 잘못을 지은 가해자들이 존재했으니까, 사람을 혼자 오래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어쩔 수 없이 밉고 무섭고 끔찍한데, 계속 두려워할수록 나 자신이 제일 크게 마모되더라.
그냥 단순히 '누구나 그래'보다는
좀 더 내 무의식의 자해를 멈출 구체적인 논리가 필요해서 생각했던 일.
이해에 대한 내 생각이 나를 조금 딱딱하고 인정없이 보이도록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더 타인이 부서질까봐 소중했으며 나와 다름에 크게 마음 두지 않았고, 그만큼 사람을 가까이 둘수록 무섭고 피곤하기도 했고 버거웠다.
나는 늘 가깝지 않은 대상에게도 내 나름의 뇌내 상상을 다 해 애쓰는 편인데, 애정을 둔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음에도 계속해서 오차를 내고 실패한 이해를 대상에게 떠먹여주는 내 자신이 폭력적이라 느껴졌다. (내 피곤한 만듦새의 근본이 가장 당연한 사람의 지속적인 환경/언어/행동의 폭력성인데!)
학생 시절 친구들이거나 조금 오래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내가 어지간하면 듣고 있고 웃고 싫은 소리 안 하는 사람이고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고 했었다. 관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어줄 것 같은 편한 사람이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느 기점으로부터 외로웠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이 위태로운 내 내면의 모습을 감출 수 없게 된 후에는..
예전에 내가 함께 일했던 정말 좋아했던 팀이 있었고, 팀 안에서 이성적이면서 쿨하고 예리한 엄마같은 캐릭터의 한 선배가 내가 너무 많이 버벅거리고 고장 난 채로 주춤거리고 있을 때 물어왔었다.
'아름씬 이 프로젝트 성공해서 돈 많이 생기면 하고 싶은 꿈이 뭐예요?'
같은 질문이었다. 문장 자체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내 대답에 되돌아왔던 일침이
'아름씨는 꿈에 스스로가 너무 없어. 병원을 가서 긴 시간 입원을 하든 해외여행을 가든 하면 좋잖아.'
였다. 조금 답답해하며 말씀하시는데 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고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그때 꽤 충격을 받았다. 상처 같은 게 아니라 충격이었다.
나 스스로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너의 꿈은 너무 따뜻하고 멋지다'라고만 했으니까.
내가 아무리 자존감이 없고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디자인과 타인에게 가치를 두고 살았어도
난 상상 속의 부유한 내 미래에서조차도 내가 없구나-라고 깨달았었다.
그때 내 대답은 내가 떠올리고 입에 올릴 때마다 너무나 사랑하고 동시에 아파하는 동생들과
아무것도 없는 나를 아무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그랬던 것 같다.
또 내 오랜 '따뜻하고 멋진' 희망사항에는 언젠가 성공의 기준은 모호하더라도 돈이 많아지면,
어릴 적의 나와 같은 여학생들을 찾아가 컴퓨터를 사주고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밥을 즐거운 대화를 하며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고, 디자인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나는 비록 겨우겨우 의무교육을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 소녀가장으로써 출퇴근을 하며 엎어지고 배워가며 갖게 된 디자인이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그 아이들에게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평생 사라지지 않을 자신의 무기를 갈고닦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한 꿈이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선 사실 내가 내 건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고, 커리어도 더 치밀하게 쌓고 남보다 몇 배가 되는 기회를 움켜쥘 수 있게 도전하며
나 자신의 내적/외적 부를 전부 쫓아야 마땅한 것인데.
그렇다고 누군가가 이런 피곤한 감정들을 내게 쏟아부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칼 같은 더치페이도 아니고 더치 러브, 더치 관계가 어딨나 싶고. 기브 앤 테이크는 관계의 기본이지만, 그걸 정량으로 재고 있는 거야말로
내 기준 안드로이드적인 사고라고 생각하고..
교통사고처럼 충돌하는 인연과 강렬한 사랑,
계절과 함께 찾아오던 유년시절의 새로운 친구들,
그런 식의 돌발 이벤트가 점점 희박해지는 삶의 틀 안에서
견고해지는 내 안의 바리케이드를 깨부술 무언가를 늘 갈망하게 되는 것 같다.
인연이든, 친구든, 일이든, 성공이든.
요즘의 현대인들은 그래도 취미든 비전이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워가며 스스로 이벤트를 만드려 노력하는 것 같다.
어른의 고독이란 건 결국,
그런 시절을 향한 그리움과 딱딱하게 굳어가는 자신의 발을 쓸쓸하게 내려다봄에 있지 않을까.
브런치를 통해 답장을 드릴 수 없는 주소로 긴 장문의 이야기를 풀어주신 H님, 제가 브런치에 띄엄띄엄 무언가를 쓰면서 이메일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아무리 익명에 회신 불가한 이메일이라도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테죠. 감히 이해할 순 없지만, 제 최선의 상상과 공감을 다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너무 뜨거워 어지러울 땐 스치듯 식혀줄 시원한 바람이, 너무 냉랭해 외로울 땐 따뜻한 볕이 늘 곁에 머물 수 있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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