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배반이 안겨준 성장
"나는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해."
이 말을 믿었어야 했나, 믿지 말았어야 했나?
나는 이 말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았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믿고, 기도한다는 말은 반만 믿었다. 어떻게 자신을 위한 기도도 매일 하기가 어려운데 내가 뭐라고 나를 위해 매일 기도를 할까.
그런데 좋은 소식 하나를 들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전했다.
"나 투고한 원고 출판사에서 계약하제."
"어? 네 글이 책이 된다고?"
"어. 그렇데. 뭐 끝까지 써야 하긴 하지만 쓰기만 하면 나도 작가가 되는 거지."
"그렇구나... 잘 됐으면 좋겠네...."
뭘까, 이 느낌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잘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그저 내 느낌이었을까. 그냥 단순히 느낌이 아니었다는 건 뒤로 돌아 들리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책을 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는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저러다 책이 출간되지 않으면 그 실망감을 어쩌려고 저러는지. 차라리 희망도 없었어야 했는데 걱정이라고. 계약하자는 출판사는 온전한 출판사는 맞는 건지...라고 한 말을 전해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을 믿어야 하는 건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따뜻하고 정이 넘치며, 매사에 타인을 위할 줄 아는 좋은 사람입니다. 정말 그럴까?
나는 누구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나누고,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건강하기를 위해 기도할 거야.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래야지. 꼭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지’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마음이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도 믿지 못하는 마당에 타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언제나 혼자 일 수는 없고, 때때로 함께의 가치를 만들며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 낼 수 있을까.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 같은 소소한 일이라 해도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들이 쌓이면 자연스레 의심부터 하게 되는 건 보편적인 마음이다. 그렇지만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좋은 관계도 좋은 일도 괜찮은 삶도 만들기가 어렵다.
이러한 고민과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들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 방법을 터득했다.
‘사람을 신뢰하되 기대하지 않을 것’
이 신뢰는 온전하고 안전하다는 신뢰가 아닌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지 나를 해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신뢰이다.
살면서 딱 이 정도로만 누군가를 신뢰하며 살아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