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남긴 흔적, 선택이 그릴 무늬
과거 속에서 그리움과 한 번 더 똑같이 살아보고 싶은 간절함을 생각한다면 지금껏 살아온 삶이 희극일 것이고,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아픔과 슬픔들을 생각한다면 살아온 인생이 비극이 된다. 분명 지나온 삶에는 희극 속의 나도 비극 속의 나도 존재한다. 그러나 삶의 흔적이 흉터가 될지, 존재의 가치를 그릴 무늬가 될지는 ‘지금의 선택’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심리컨설팅 장면에서 다양한 내담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 본다면 하나는, 과거의 경험을 끌어와 자신을 혹독하게 괴롭히고, 과거의 화려했던 자신을 현재의 자신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지옥으로 밀어 넣으며 사는 이들이다. 그런 일상을 힘겹게 살아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괴로운 지옥의 일상이 얼마나 힘겹고 아플지 생각해 보면 그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는 자체만으로도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삶에 남은 흉터를 쓰다듬으면서 살아갈 힘을 내어 살기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의 삶도 살기 위한 최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부류는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방향성과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고민으로 컨설팅을 원한다. 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난날들의 흉터든 무엇이든 흔적은 지금의 나로 성장하게 된 과정일 뿐 미래에 똑같이 있을 일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다시 생각하며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해서 이성을 넘은 이상의 미래를 계획하고 상상하며 만들어 나가길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컨설팅 중에 깨닫게 되거나 알게 되는 것들을 수용하는 자세가 남다르다. 모든 것들을 습득하고 실행해 보기를 즐기고 응용해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선택에 따라 살아온 결과가 지금이라는 것과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 역시 내담자들의 부류에 빗대어 본다면, 이전의 나는 첫 번째 부류에 속해 있었고, 지금의 나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해 있다.
이전의 나는 ‘어째서 나는…’, ‘내 인생은 왜…’라는 질문 속에서 나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파했다. 어쩔 수 없는 배경과 환경,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부여잡고 울며 불며 떼쓰는 삶이 반복될수록 삶은 더 지옥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돈도 백도 뭣도 없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도 행복하고 싶다고, 나도 잘 살고 싶다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만든 틀 속에서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의 나는 좋지 않은 감정에 휘둘리는 상태를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웃기로 선택하고 조금 더 넓은 마음과 깊이 있는 생각을 하면서 삶을 조망하는 시선으로 바꿔 놓았다. 어떤 자극도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없으며 설령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상황이 생겨도 굳이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심리적 능력 ‘회복탄력성이 키워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도, 배경도, 자극도 한 사람의 인생에 아주 작은 영향은 줄 수 있지만 인생 자체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니 내 삶 또한 무엇도, 누구도 제 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없다. 나에게 상처를 가득 준 누구라 할지라도 나는 그를 괴물이 아닌 스승으로 둔갑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거칠거나 직설적으로 마음에 생채기를 낼 만한 말을 해도 그 말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기보다 그 말을 딛고 성장하기를 선택해 살아왔다. 이 선택이 못 된 말을 하는 상대를 괴물이 아닌 스승으로 바꿔놓는 비결이다. 이처럼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유익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낸 삶을 뒤돌아 다시 생각해 봐도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런 선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