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아니고 ‘남편의 엄마’라면

by 알깨는 아줌마

나에게 이름 주어진 역할 며느리.

내가 나타나면서 그분들에게 이름 붙여진 역할, 시부모.

이 역할들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나는 아들이 없어서 시어머니가 될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도 그 역할의 고충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며느리’라는 역할에 대한 첫인상은 굴욕감이었다.

70~80년대에 태어나 본인의 엄마나 각종 드라마에서 보아온 고부관계를 통해, 우리 세대는 이미 그 불합리한 수직관계를 간접적으로 충분히 배워왔다.

분명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디 숨어 있던 유전자가 발현된 걸까?

저절로 ‘굽신 모드’에 들어가는 나 자신이 어리둥절했다.


왜 나는 벌떡벌떡 일어나 그릇을 나르고, 어느새 개수대 앞에 서 있는 걸까?

왜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은 소파에 널브러져 TV를 보거나, 자기 방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자는 걸까?

’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겪었을 것이다.


‘며느리’라는 호칭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징그러운 벌레에 붙여진 이름, 쥐며느리. 건드리면 골처럼 몸을 말고 죽은 척하는 애.

쥐를 만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만난 듯 꼼짝 못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좋아하려야 좋아하기 힘든 호칭이다.


‘며느리’라는 이름은 나라는 한 개인을 고유한 존재로 머물지 못하게 하고, 역할과 기대를 덧씌운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각본을 작동시킨다.


이런 생각들이 커져서 머릿속에서 터져 나갈 것 같았을 때,

나는 혼자 조용히 ‘남편의 엄마’라고 되뇌어본 적이 있다.

내 남편의 엄마.

시어머니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고, 그녀가 살아온 시간, 아들과의 소중했을 시간들이 떠올랐다.

내 엄마가 나에게 그렇듯이, 남편에게도 얼마나 소중한 사람일까.


반대로, 남편의 엄마는 어떨까?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아내’라고 나를 부른다면.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의 인생 동반자, 자신에게도 무엇보다 소중했을 그 시간들을 함께하는 사람.

한 다리 건너의 관계로 역시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응원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고마운 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시어머니’라고 떠올리기보다는 ‘남편의 엄마’라고 종종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듯, 그렇게 소중하게 남편에게 모든 걸 내어줬을 그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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