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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1 (2014)

2020년에 돌아본 2014년 여행

by Blue Bird


2675314B541CAE9D0D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로 올라가던 중에.


올해도 떠났다. 알래스카로. '세라 등록금 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여행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지만 과감하게 뿌리치고 떠났다. 등록금은 등록금이고, 여행은 여행이다. 어쨌건 세라는 2학년을 시작하게 됐다. 우리가 지금 여행을 가지 않으면 언제 갈 수 있을까?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자.


세라가 여름방학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래스카에 들러가는 방법으로 세라 항공비는 절약하고, 소피와 나만 호놀룰루-앵커리지 왕복 편을 끊으면 된다. 호텔도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떠나는 날이 8월 23일, 우연히도 지난해 보스턴으로 출발하던 날과 같은 날이다.

이번 일정은 앵커리지에 도착해서 페어뱅크로 올라갔다가 3~4일 후에 다시 앵커리지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핵심은 1. 오로라 2. 곰, 사슴, 연어 등 동물 3. 빙하 등 자연, 이 세 가지다. 이 세가지만 충족하면 된다. 아니 이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아도 좋다. 가족과의 추억이 쌓이니 그것만으로도 좋다.


호놀룰루발 알래스카항공은 토요일 밤 9시에 정확히 출발했다. 밤에 비행기를 타면 잠도 잘 안 오고 몸만 피곤한 것이 걱정됐는데 역시 괴로웠다. 비행시간이 불과 6시간밖에 안되는데도 낮의 12시간만큼이나 피곤하다. 게다가 알래스카 항공의 좌석은 전보다 더 좁아진 느낌이다.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비몽사몽 그렇게 갈 수밖에.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일 년에 두 번씩 보스턴에서 하와이에 왔다가는 세라는 얼마나 힘들까. 여행 다니는 건 좋은데 비행기 타는 건 참 싫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래도 도착 한 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부터는 이제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희망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버티자, 국방부 시계가 가듯 항공기 시계도 간다.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일요일 새벽 5시다. 어스름한 새벽녘,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랜트카 픽업하는 곳으로 가보니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안내판을 보니 6시부터 근무한다. 좀 기다리니 다른 랜트카 회사 직원은 5분 전부터 나와서 일하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빌리기로 한 쓰리프티는 10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결국 쓰리프티에서도 직원이 한 명 나타났다. 차를 빌리는 비용 이외에 보험 등 여러 가지 상품을 덧붙여서 팔려고 제안했지만 나는 한결같이 우리 보험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특히 옵션이라며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하나를 고를 뻔했다. "세 가지 중에 하나는 꼭 들어야 하는 거냐?" 고 묻자 직원은 "옵션"이라고 말했기에 나는 "그럼 하나도 안 고르겠다"라고 했다. 그러다 여러 군데 이니셜을 하다가 운전자가 한 명이라는 항목을 보고 "추가 운전자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하자 운전자 추가 비용이 하루 10불이란다. 랜트 기간이 일주일이니 70불이 추가된다. 소피가 운전해봐야 총 주행거리의 1/10도 안 되겠지만... 할 수 없다. 랜트카 직원이 열심히 권하던 보험에는 끄덕 않던 내가 추가 운전자 조항을 보고 스스로 추가금액을 낸 격이다. 누가 운전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냥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마음으로.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로 직접 운전해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디날리 공원을 지나가는 조지 팍 하이웨이가 가장 단거리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 길로 간다. 하지만 글래날렌-델타정션-페어뱅크로 가는 리차드슨 하이웨이는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하지만 경치가 더 좋다. 조지 팍이 7시간 정도 걸린다면 리차드슨은 9시간 반 정도 걸린다. 그것도 아무 곳도 들르지 않고 곧장 갔을 경우이고, 도중에 개스를 넣거나, 구경을 하거나, 도로공사라도 하고 있으면 시간은 하염없이 늘어난다. 그러고 보면 호놀룰루에서 앵커리지까지 오는 시간보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로 가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우리는 그래도 더 먼 길을 선택했다. 경치 좋은 길로 가자. 어차피 여행 온 거 아닌가?



2706DA4A541CBB6929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 길



달리던 중에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나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 어디 뭐 사 먹을 곳도 없다. 화장실도 없다. 가끔 쉬어가는 곳이라는 표지판이 나와서 "이번에는..." 하면서 기대하지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옆으로 잠시 차대는 길이거나 간이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다. 아직은 가득이지만 가스가 바닥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그러다 Home Style Meals이라는 간판이 있는 한 통나무집을 보고 즉시 차를 세웠다. 그래 여기다! 우리가 아침 겸 점심을 먹을 곳은. 지금 다시 찾아가 보라고 하면 어딘지 전혀 감이 없는 그런 곳에서 오믈렛,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다행이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



254F5949541CBDD72B 이 집이 거기에 없었더라면 저녁때까지 굶었을 수도



아침을 먹고 꼬박꼬박 조는 소피와 세라를 태우고 또다시 달렸다. 길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싸움도 안 되는 싸움을 걸며 달렸다. 이런 길을 만든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달렸다. 도중에 길을 따라 그 유명한 알래스카 송유관이 오른쪽으로 나타났다가 왼쪽으로 나타났다 했다. 자연은 참 대단하지만 인간도 참 대단하다. 자연은 그 거대함이 대단하고, 인간은 그 거대함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참 대단하다. 앵커리지에서 오전 6시 조금 지나 떠났는데 이제 12시간이 지났고 드디어 페어뱅크에 도착했다. 오래전에 구입한 네비는 우리의 숙소인 햄튼 인 페어뱅크를 찾지 못했다. 세라의 전화 네비를 이용해 호텔에 도착했다. 아마도 내비게이션을 만든 이후에 호텔이 생겼을 것이다.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우리의 늙은 네비는 호텔도, 호텔이 서 있는 도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물음표만 던지고 있었다.



274FAA4A541CC11F02 12시간 걸려 도착한 햄튼 인 페어뱅크




2014년 알래스카 여행은 좀 무리해서 다녀온 것이긴 하지만 지나고 나니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무리했다는 말은 여행 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을 말한다. 세라가 본토의 사립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이 항상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학비만 5만 달러 정도이고, 거기에 기숙사비, 식대, 용돈, 그리고 방학 때마다 하와이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는 항공비 등을 합치면 거의 연간 10만 달러에 가까운 비용이다. 학생 론도 하고, 학교에서도 어느 정도 장학금을 받더라도 우리 집 살림이 빠듯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세라가 대학은 보스턴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일단 보내는 주었다. 하지만 일단 보내면서도 내가 4년간 그 비용을 지원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면서도 보낸 이유는 있다. 일단 해보고 싶은 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학교에 진학하는 데 가고 싶은 대학에 돈이 없어 못 간다는 것을 나는 용납하기 힘들다. 일단 시작해놓고 보는 거다. 그 후에 가능한 길을 찾자는 주의다. 만약 정말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워진다면 그때는 다시 하와이로 돌아오면 된다. 일단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해서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봤으니 후회는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학비가 비싸서 포기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상으로 봤을 때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다. 세라의 경우도 결국 무사히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니 신기하게도 내 수입이 그만큼 늘어났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2014년 여행은 그래서 떠난 것이다.

알래스카. 몇 시간을 운전해도 아무도 없고 좌우에 나무만 무성한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기분, 참으로 좋다. 해방감이다. 사람으로부터, 도시로부터,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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