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진 애틀랜틱은 처음이다. 생각보다 좌석에 여유가 있다. 항공기를 타보면 느끼는 것인데 꽉 찬 좌석에서는 뭔가 숨 막히는 만원 버스 느낌이 나고,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은 경우에는 여유가 느껴진다. 항공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꽉 찬 비행을 윈할테지만 승객 입장에서는 동승한 승객이 가능하면 적을수록 좋다. 소피와 세라는 왼쪽 창가 좌석에 나란히 앉고 나는 가운데 열의 왼쪽 편 끝 좌석에 앉았다. 가운데 좌석이 네 자리인데 가운데는 아무도 없었고 두 자리 건너 오른쪽 끝에 여자 한 명이 앉았다가 이내 자리를 옮겼다. 좌석이 다 비어있는 창가 쪽으로 가서 더 편하게 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 덕분에 나도 상당히 편해졌다. 나중에 기내식을 먹고는 아예 네 자리를 차지하고 길에 누웠다. 고생 끝에 낙인가 보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항공기를 놓칠지 몰라서 몇 시간 동안 마음 졸였는데 이젠 다 해결되고 자리까지도 편하다. 작년에 이스탄불 갈 때 탔던 터키항공도 좋았지만 버진 애틀랜틱의 서비스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항공사들은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겠다. 스튜어디스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터키항공은 불쌍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하지만 버진 애틀랜틱은 효율적으로 하는 것 같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건 밤 9시쯤이었다. 공항에서 런던 시내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히드로 익스프레스 (Heathrow Express)를 타면 15분이면 갈 수 있다. 다른 교통편에 비해 비싸다고 하지만 표를 미리 예약하면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다. 히드로 익스프레스로 한 번에 페딩턴 역에 도착했고 거기서 힐튼 메트로호텔까지는 걸어갔다. 가방 때문에 보통 공항에서 호텔을 가거나 호텔을 옮길 때는 대부분 택시를 타지만, 지도상으로 호텔까지 걸어서 5~6분 정도이니 이 정도면 걸어도 되겠다 싶었다.
저녁은 호텔 찾아가는 길에 봐 둔 식당에서 휘시 앤 칩 (fish & chip)을 픽업했다. 휘시앤칩을 먹으려면 맥주가 필요해 슈퍼마켓에 들러 맥주를 고르려는데 직원 중 한 명이 오더니 "맥주는 지금 살 수 없다"라고 한다. 그때가 밤 11시였는지 12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시간 이후에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캐나다에 갔을 때는 아예 리커스토어에서만 술을 판매하더니, 영국에서는 슈퍼마켓에서 살 수는 있는데 시간제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술 판매하는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맥주가 있어야 휘시앤칩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갈 것이 확실하니 어딘가에서 맥주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호텔 로비에 있는 맥주를 잔으로 픽업하면 된다. 싱싱한 휘시를 통째로 튀겨주는 것이라 맛이 좋다. 튀긴 음식이라 기름기가 있지만 맥주가 있으면 괜찮다.
본격적으로 런던 여행이 시작되는 아침이다. 9시쯤, 늦은 호텔 조식을 먹고, 호텔 앞 쇼핑센터에서 세라가 필요하다는 벨트를 하나 산 후, 호텔에서 가까운 튜브 역으로 갔다. 휴대폰 심카드는 어제 이미 공항에서 자판기로 사서 갈아 끼웠다. 세라는 보스턴에서 온라인 쇼핑을 통해 미리 심카드를 샀다. 런던에서는 튜브를 많이 이용할 생각이기에 역에서 오이스터 카드 (Oyster Card)를 하나씩 사서 20파운드씩 넣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나는 이 시간이 가장 좋다. 처음 온 어느 도시를 이제 막 탐험하러 나가는 기분이다. 이 맛에 호놀룰루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거의 하루 동안 고생하며 오지 않았는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빅벤 (Big Ben) 쪽이다. 빅벤이 한창 공사 중이라 시계가 거의 가려져 있는 걸 모르고 그 앞에서 한참 찾았고, 템스강(Thames) 건너편의 런던 아이(London Eye)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사진으로 또는 영상으로만 보던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여행이 주는 참맛이다. 각도야 책에 나오는 사진이 더 좋을 테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를 체험하러 여행을 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애비(Westminster Abbey) 앞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부 구경을 미루고 지나친 후 버킹엄 궁전 쪽으로 걸었다. 그 길은 세인트 제임스 공원 (St. James's Park)을 가로지르는 길인데 공원은 나무와 호수, 새들과 다람쥐 등 자연 그대로 살아있는 멋진 곳이었다. 근위병 교대식만 아니라면 공원 내 벤치에 한참 동안 앉아있고 싶은 곳이다. 마침 도착하자마자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이 열렸다. 이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던 모양이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교대된 근위병 행렬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우리는 트라팔가 (Trafalgar Square) 쪽으로 걸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처음 가보는 곳이라 구글맵으로 위치를 찍어가면서도 잠깐씩 방황하기가 일쑤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잠깐씩 방황하는 순간이 너무나 익숙한 곳을 잘 찾아다니는 것에 비하면 훨씬 행복하다. 나만의 생각일까. 광장 한편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에 들어가 구경하고 나와 갤러리 앞 계단에 잠시 기대어 광장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튜브를 타고 스카이가든(Sky Garden)으로 향했다. 입장인원 제한이 있다고 해서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런던은 이 계절 - 9월 말 10월 초 - 에 비가 자주 내리는 것 같지만 비에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또한 이곳이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쓰면 되는 것이다. 비가 와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예약한 사람도, 예약 안 한 사람도 차례차례 스카이 가든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런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 지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이지 싶었다. 멀리 영국에서 가장 높다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빌딩 중의 하나) 샤드 (The Shade)가 하늘로 올라가는 기둥처럼 우뚝 서있다.
어느덧 해가 질 기세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늦게 나오니 구경 다니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더 좋다. 우리는 너무 급하게 돌아다는 것을 싫어한다. 휴가차 여행 온 것이다. 한창때도 아니다 (물론 세라는 23살이니 한창때지만) 어차피 여행 중에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다. 여유 있게 다니면서 볼 것만 보자. 저녁은 호텔에서 픽업한 피자와 근처 레바논 식당에서 픽업한 음식으로 호텔에서 먹었다. 유명하다는 곳을 몇 군데 갔더니 어째 하루 만에 런던을 디 본듯한 느낌이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느낌이 그렇다.
23살 된 딸하고 같이 다니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서로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세라만의 시간을 많이 주는 편이다. 여행 자체도 오고 싶으면 오고 안 오고 싶으면 안 와도 된디고 항상 말하지만 세라는 항상 따라온다. 그런 중에도 곳곳의 장소에 가면 서로 다른 관심사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디서 몇 시에 다시 만나자 하고는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어쩌면 이렇게 다니는 것이 항상 같이 묶여서 다니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