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 있는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한장여행그램 020. From, Pai, Thailand.

by 키만소리
27.jpg


한장여행그램 020. 태국에 있는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이방인인 나에게 집이 되어준 그곳

열병을 앓고 드러누운 나에게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쓰다듬어 준 그곳

빠이에 가고 싶다.



열병, 장기 여행족들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불청객.


갈 길이 먼 장기 여행족들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열병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감기 몸살처럼 아플 조짐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과 달리 열병은 내가 짊어지고 다녔던 배낭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나를 한순간에 짓누른다.


내가 여행 열병에 처음 걸렸을 때는, 방콕에서 북부 지방으로 올라온 후였다.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었던 방콕을 뒤로 한 채, 치앙마이행 나이트 버스 타고 짙은 밤이 새하얀 백야가 될 때까지 버스에서 실신해있었다. 밤새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하는 버스의 승차감이 좋을 리 없었다. 편안하게 온 몸을 누일 수 있는 슬리핑 버스를 타지 않은 걸 후회하는 수밖에.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어재낀 후, 내 몸도 의자 위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지옥의 나이트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열병의 씨앗도 내 몸에 안착했다.



치앙마이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배낭여행자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한 '빠이'로 목적지를 옮겼다.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버스로 3~4시간이면 도착하는 아주 작은 동네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버스도 없어서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야 하는 그런 곳, 소박하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동네다. 나는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마을이 주는 편안함을 느꼈다. 작은 동네는 많이 방문해봤지만, 빠이가 주는 편안함은 다른 특별함이었다. 이 곳이 왜 배낭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었다. 평화롭다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동네가 어디 있을까. 이방인을 못 살게 구는 사기꾼의 시선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경계에 지쳤던 나는 빠이가 주는 편안함에 굳게 올라왔던 어깨가 살며시 풀어지는 걸 느꼈다.



'아, 여기 참 좋구나. 이 곳에서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열병으로 쓰러졌다.



첫 배낭여행이었다. 게다가 장기 여행. 여자이기에 남자 여행자보다 늘 경계심에 사로잡혀야 했다. 여행 내내 잊고 지냈던 피로함이 곪아 터져버렸다. 숙소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만 잤다. 배도 안고팠다. 그냥 조용히 내리 잠만 잤다. 혼자 상념에 빠지는 시간이 넉넉했기에 눈을 감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걸까. 잠자려고 배낭 메고 떠나온 게 아닐 텐데.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아직도 이렇게 많은데,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하루만 아프자. 여행자에겐 아픔도 사치야.



타지에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여행의 조급함을 만들어내서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자로서 0점 같았던 시간이 흘렀고, 충분한 휴식과 잠으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나는 열병을 훌훌 털어냈다.



배가 고프기 시작한 걸 보니 병이 다 나은 게 틀림없었다. 여행자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빠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동네였다. 매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것 같은 맑은 하늘과 쾌청한 날씨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페달을 밟는 내 발도 가볍고 핸들을 돌리는 내 손은 날아갈 것 같았다. 방전되었던 내 몸에 생기가 돌고 있음이 느껴졌다.



시장에 도착해서 망고스틴과 닭고기 구이를 샀다. 인심 좋은 할머니가 망고스틴을 까는 방법을 보여주더니 두어 개 더 얹어주셨다. 닭고기 구이를 파는 청년은 날 보더니 스파이시?라고 물었고, 나는 스파이스 오케이!라고 말했다. 그 후 그 총각은 묻지 않고 항상 스파이스 소스를 발라주었다.



이상한 동네다.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이상한 동네가 틀림없다. 고작 며칠 머물었을 뿐인데, 나를 동네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준다. 이 곳에선 이방인의 이름표 대신, 한국에서 온 김씨 아가씨였고, 망고스틴을 좋아하고 종종 닭고기 구이를 사러 오는 옆집 아가씨였다. 집을 떠나 배낭을 메고 고생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열병에 걸려 아팠는지 알 것 같았다. 집이 그리운 장기 여행자에게 여기선 괜찮아, 잠시 쉬어가도 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빠이였다.



나는 이 곳에서 여행의 조급함을 모두 내려놓았다. 아플 때 들었던 쓸데없는 생각들은 그대로 쓰레기 통으로 집어던졌다. 쉬어가도 괜찮다는 것,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는 사실을 초짜 여행자였던 나는 그때 배웠다. 여행 의욕이 앞서 내 몸을 혹사시키며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날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여행을 즐기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내겐 없었다. 나는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빠이에서 보냈고, 그동안 내가 놓쳐왔던 여행의 여유를 만끽했다.



빠이를 떠나는 날, 나는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한동안 마을 쪽을 바라봤다. 잘 있어요. 저는 이제 다시 여행을 시작합니다. 잘 쉬었다 갑니다. 제겐 집이 되어준 이 곳을 잊지 못할 겁니다, 고 마음속 인사를 나눴다.



떠도는 기쁨이 여행의 제 1의 즐거움이라면, 머무는 여유는 제 2의 즐거움일 것이다.


내게 머무는 여유를 알려준 곳은 나의 제 2의 집, 빠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속에 제 2의 집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제 2의 집은 어디인가요? 그곳에서 제가 느꼈던 머무는 여유를 느끼셨나요. 만약 아직 제 2의 집이 아직 없다면, 빠이에 가보세요. 당신도 분명 그 곳을 사랑하게 될거예요.




+한장여행그램, 조금 더 엿보기


SAM_5235.jpg 빠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찍은 풍경. 이 때부터 빠이가 좋았다.




SAM_5249.jpg 나의 발이 되어준 자전거. 이 당시에는 운전면허가 없어서 스쿠터를 탈 수가 없었다.




SAM_5241.jpg 빠이의 하늘은 언제나 맑음




SAM_5265.jpg 호텔 매니저가 데려다 준 빠이의 명소. 작은 마을 규모처럼 명소도 아주 소소하다. 이 곳에 데려다 준 호텔매니저의 뿌듯함이 귀여워서 멋있는 척을 했다.




SAM_5293.jpg 별로 신기해하지 않는 나를 눈치챘는지 곧바로 죽음의 산책코스를 소개시켜주심. 빠이에도 익스트림 코스가 있었다.





SAM_5264.JPG 나의 1일 관광 가이드가 되어준 호텔 매니저. 다음날 스쿠터를 부러워하는 나를 보더니 스쿠터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SAM_5275.jpg 내 생에 처음 스쿠터를 몰아본 날, 호텔 매니저의 지도아래 스쿠터를 배웠다. 하지만 너무 못해서 돌아오는 길엔 뒷 자석에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목숨은 소중하다고 말했다.




SAM_5254.jpg 내가 묵었던 숙소의 수영장. 방콕의 물가에 비하면 이 곳은 정말 천국.




한 장의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합니다.

저와 함께 여행하실 분들은 '한장여행그램' 구독하기 버튼을 눌러 티켓팅 해주세요 :)

https://brunch.co.kr/magazine/onegram

keyword
이전 19화커피의 기적이 있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