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여행그램 026. From Korea
한장여행그램 026. 굿바이, 나의 디제이
라디오를 들으면
혼자 있다는 생각을 안 하게 돼
주파수 너머로
같은 음악을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거든.
내가 좋아하던 라디오의 디제이가 하차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나의 저녁시간을 책임져주던 그녀는 하차 소식을 전하다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도 울고, 나도 울고, 그녀의 라디오를 사랑했던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그녀는 하차 소식을 전한지 일주일 만에 진짜 굿바이 인사를 했지만, 나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그녀의 빈자리에는 새로운 디제이가 왔고, 그제야 진짜로 그녀가 없음이 실감 났다. 오랜 시간 동안 사귀어왔던 정든 벗이 나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것 같아서 참, 서운하고 서운했다.
지금도 라디오를 들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누구나 쉽게 재밌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시대니까. 그에 비해 나는 아직까지 라디오를 좋아한다. 별밤을 듣고 자란 시대는 아니지만, 친구들에 비해 나는 참 라디오를 많이 듣고 자랐다. 6살 위 언니가 하는 건 다 멋지고 좋아 보였던 나는 언니가 하는 것들을 많이 따라 하곤 했는데, 라디오가 그중 하나였다. 언니는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곧잘 녹음하곤 했다. 최신 가요부터 팝송까지 다양한 장르를 한데 모아 만든 테이프에 손글씨로 적은 음악 리스트를 A면과 B면에 적으면 MAX 시리즈 남부럽지 않은 테이프가 완성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디제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녹음 버튼을 눌러줘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디제이 멘트와 음악이 중첩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정말 피디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좋은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들었던 라디오는 점차 내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의 빈 곳을 라디오가 채워줬고, 야자가 끝나고 집에 오는 헛헛한 길목을 라디오가 밝혀주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젖은 적도 있었고, 디제이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 콧물 뺀 적도 많았다. 또, 버스에서 듣는 라디오는 어찌나 재밌고 좋은 노래만 흘러나오는지. 음악을 더 듣고 싶어서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었다.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는 풀어도 풀어도 계속 쏟아질 정도로 라디오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오랜 시간 라디오를 듣다 보니 선호하는 디제이가 생기기 마련. 나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라디오 디제이들을 많이 선호했는데, 그중에 내 최고의 디제이는 바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이다. 심야 라디오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디제이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는 정말 인기가 많았다.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악 선곡과 정지영 씨의 목소리는 잘 어울렸고 불 꺼진 방안에 누워 듣기 참, 편안했던 디제이였다. 출판 사건으로 디제이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장시간 마음을 준 디제이였기에 그녀의 하차는 정말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 이후 많은 디제이들이 스위트 뮤직박스의 새 주인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이후로 디제이에게 마음을 주는 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알았기에, 그 이후부터는 메뚜기족처럼 라디오를 옮겨 다니며 들었던 것 같다.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
정지영 아나운서가 초대 DJ이고 오랫동안 진행하였다. 특유의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분위기, 적절한 선곡은 자정을 넘은 시간에 부담 없이 듣기에 알맞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애청자는 주로 조용한 분위기를 필요로 하는 수험생이나 학생 또는 야간일을 하는 직장인들이었으며 군인들 역시 많이 들었다.
프로그램 명인 '스위트 뮤직박스' 대신 '달콤 상자', '달콤 음악상자'라고도 했으며 청취자를 '달콤 가족'이라 주로 불렀으며 정지영 DJ는 '달콤 DJ'라고 불렸다. 새 학기에는 고3 수험생 청취자를 '특별관리대상'으로 선정, 사연 소개나 신청곡에 우선권을 주기도 했다.
당시에 게스트가 출연하는 코너는 거의 없었으며 사연 소개와 신청곡을 틀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2~3가지의 일일 코너가 존재했다. 일일 코너는 대표적으로 '사랑에 관한 101가지 정의', '사랑이 사랑에게, '밤에 쓰는 편지'가 있었다. 특히 각 코너마다 나오는 BGM 역시 인기가 많아서 문의글이 쇄도하다 보니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BGM 곡명을 올려놓기까지 했으며 시그널 곡인 'Little Moritz - Bernward Koch'는 많은 청취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내가 즐겨 들었던 또 다른 라디오 역시 심야 시간에만 들을 수 있는, 이주연의 영화음악이다. 줄여서 '이영음'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이 라디오는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 음악을 다루는데, 구성이 참 알차고 틀어주는 노래들도 어찌나 주옥같은지 귀가 호강한다. 타 라디오에서 잘 틀지 않는 일본 애니메이션 ost 같은 비주류의 음악도 거침없이 틀어주며, 장르 불문 오직 '영화'라는 장르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라디오 같아서 격하게 아낀다. 몇 번의 개편과 흑역사를 거쳤지만, 이주연의 영화음악은 여전히 온에어 중이다. 영화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네뜨 디제이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주연의 영화음악>
1983년 방송을 시작하여 일부 기간 방송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하기를 반복하며 프로그램 이름도 조금씩 변경되는 등, 방송에 있어 여러 가지 부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DJ와 제작진을 거쳐 현재까지도 계속하여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MBC FM의 심야 간판 프로그램. 영화와 영화음악을 전문으로 파고드는 국내에 남은 몇 안 되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으로서, 타 방송사의 다른 영화음악 프로그램으로는 CBS 음악 FM '신지혜의 영화음악', SBS 파워 FM '박선영의 씨네타운'이 있지만, 상기한 두 방송은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송출되지 않는 관계로, 전국 어디서나 송출되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으로는 유일하다.
MBC FM4U에서 새벽 2~3시에 방송 중이며 이주연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있다. 줄여서 이영음이라고 부른다. 이영음에서 이주연 아나운서의 애칭은 아네트. 아네트 DJ의 영향으로 스태프들도 영화배우의 이름을 딴 애칭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이자벨이라든가 줄리아라든가, 리처드라든가, 쏜튼 국장님이라든가. 아니 이 애칭은 개편으로 피디가 새로 들어오면 무조건 하나씩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
마지막으로, 내가 최근까지 좋아했던 디제이는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다. 생뚱맞았던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라디오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랑스러운 디제이가 되었고, 피곤함에 지쳐있던 퇴근길을 미소 짓게 만들어주는 그런 디제이였다. 볼륨 가족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유디 때문에 참 행복했었는데, 그런 그녀가 떠났다. 맞다. 서론에 나온 디제이가 바로 그녀다.
그제부로 그녀의 약 5년의 디제이 활동이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오겠다며 씩씩하게 굿바이 인사를 건넸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그녀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립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디제이를 하고 싶다는 그녀였기에 이렇게 이른 이별이 참 밉다.
연극의 3대 요소는 무대, 배우 그리고 관객이다. 관객이 없으면 연극이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라디오 역시 청취자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제이의 하차 소식이 청취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만들던 라디오가 이제 사라진다고 하니, 서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 하나하나에, 사연 하나하나에 내 추억을 켜켜이 새겨 넣었던 라디오가 사라진다니. 라디오에게 내 추억을 맡기는 것은 이별을 담보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이별은 서글프지만, 그래도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며 이제 그녀의 굿바이 인사를 받아줘야겠지.
좋아하는 디제이의 이별에 이제 투정은 이제 그만,
잘가요. 굿바이, 나의 디제이.
당신 덕분에 저녁이 매우 즐거웠어요.
언젠가 라디오에서 또 한번 추억을 나눠요.
한 장의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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