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뱅킹의 끝, AI에이전트 시대의 시작
지금까지 디지털뱅킹은 ‘더 빠르게, 더 편하게’라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스마트폰이 금융의 주 무대가 되면서 송금·이체·조회는 누구나 몇 초 안에 해결하는 일이 되었고, UI·UX 경쟁은 상향 평준화됐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는 언제나 다음 단계를 예고한다. 고객은 이미 스마트홈, 자율주행, 챗GPT 등 일상 곳곳에서 고도화된 AI 경험을 누리고 있다. 반면 은행권의 초기 챗봇은 여전히 정해진 시나리오 안에서만 움직였고, 고객의 맥락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격차가 바로 지금의 금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지털뱅킹을 넘어, AI뱅킹이라는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은행들은 이미 AI뱅킹 실험을 본격화하고 있다.
카카오뱅크는 ‘AI 이체’ 기능을 통해 뱅킹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고객이 “엄마에게 10만 원 보내줘”라고 말하면, 과거 이체 정보를 기반으로 대상 계좌를 알아서 찾고, 별명(아빠, 마미 등)만으로도 수취인을 인식한다.
AI는 고객의 의도가 애매하면 다시 질문하며, 마지막 비밀번호 입력은 사용자가 직접 하게 만들어 보안도 지켰다.
아직 1회·1일 200만 원 한도에 머무르지만, 버튼 중심의 뱅킹 → 대화 중심의 뱅킹으로 넘어가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나은행은 더 멀리 본다.
대화 → 제안 → 실행이라는 명확한 3단계 전략을 통해 AI에이전트가 금융의 전 과정을 대신 처리하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고객의 자연어 요청에 대화로 응답하고
필요한 정보를 선제적으로 제시하며
화면 이동 없이 대화창 안에서 거래를 즉시 완결
그저 ‘응답 잘하는 챗봇’이 아니라 정말로 실제 거래를 실행하는 AI금융비서로 가겠다는 선언이다.
이미 외국인 고객 대상 동시통역 서비스, AI 환율 예측, 신디케이트론 약정서 자동 분석 등 ‘실행형 AI’ 도입도 시작했다.
특히 신디케이트론 분석 시간이 1주일 → 하루로 단축된 사례는 AI가 단순 고객 서비스가 아닌 업무 생산성의 엔진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AI뱅킹 시대를 가장 먼저 준비한 나라는 미국이다.
특히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에리카는 이미 2018년부터 금융권 AI의 표준을 만들어왔다.
에리카는 대화형 검색만 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7년 간의 지속적인 튜닝을 통해 ‘가상 금융비서(Virtual Financial Assistant)’로 자리 잡았다.
매달 고객들은 에리카에게 5,600만 번 말을 건다.
구독 서비스 관리 : 월 360만 회
지출 습관 분석 : 월 210만 회
환불 모니터링 : 월 86만 회
청구서 확인 : 월 33만 회
FICO 점수 확인 : 월 26만 회
예:
“내 아마존 거래 내역 보여줘”
→ 신용·체크·수표 거래까지 묶어 깔끔하게 정리된 리포트를 바로 제공
이 기능 하나로 98% 이상의 고객이 원하는 답변을 얻었다고 응답했다.
앨고리즘이 아니라 ‘나를 아는 금융비서’처럼 작동하며, BoA의 이익 증가에도 실제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제 금융과 고객의 관계가 “앱을 클릭하는 관계”에서 “대화로 연결된 관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흐름이 은행 앱의 경쟁력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챗GPT 같은 ‘외부 AI에이전트’가 내 금융 데이터를 가져와 “최적의 카드 추천해줘” “내 구독요금 20% 줄여줘”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면, 고객은 더 이상 은행 앱을 열 필요가 없다.
AI에이전트는 ‘어느 은행의 상품을 보여줄지’도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은행은 플랫폼이 아니라 공급자(Provider)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하나은행이 강조하는 것이 외부 에이전트와의 API 전략이다.
"AI가 은행을 대체하기 전에, 은행이 AI를 품어야 한다"는 논리다. 앞으로 은행의 경쟁 상대는 옆 동네 은행이 아니라 OpenAI, 구글, 애플,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AI가 이체·결제·자산관리를 대신하는 순간, 전통 화폐만을 대상으로 금융을 처리하는 구조는 한계에 부딪힌다. AI가 “이체해줘”라고 했을 때 그 대상이
원화
달러
혹은 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
이 모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스테이블코인 기반 급여 지급·해외 송금·구독 결제 등이 빠르게 확산되는 중이다.
AI가 금융을 처리하는 주체가 될수록, 통화는 점점 디지털 토큰화된 형태로 넘어가게 된다.
AI의 판단·실행 속도를 기존 금융망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자산은 결제·정산 속도가 빠르고 24시간 작동하기 때문에 AI에이전트 환경에서는 사실상 기본 인프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AI뱅킹의 끝에는 스테이블코인 기반의 실시간 글로벌 뱅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균열의 초입에 서 있다.
앱 중심의 금융은 끝나가고
대화형 AI가 금융을 실행하며
통화는 점점 토큰화되고
글로벌 테크 기업은 금융권의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앞으로의 은행은 더 이상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다. 개인의 삶을 총괄 관리해주는 ‘AI 기반 라이프 매니저’로 재정의될 것이다. 은행의 경쟁력은 UI/UX도, 지점 수도, 금리 경쟁도 아니다.
결국 승부는 “AI가 고객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얼마나 빨리 실행해주는가”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실행의 무대는 전통 금융망이 아니라, 디지털 자산을 포함한 새로운 금융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AI는 이제 금융의 ‘도구’가 아니라 ‘주체’로 올라서고 있다. 에리카가 그 길을 먼저 보여줬고, 카카오뱅크와 하나은행은 그 길을 한국적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스테이블코인은 AI가 금융을 실행하는 세계의 결제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AI뱅킹은 도착점이 아니다. AI가 금융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새로운 금융질서의 시작이다.
우리는 지금, 금융의 30년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시 쓰이는 현장을 직접 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