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의 고민 중 하나랄까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데 다른 반 아이와 반갑게 인사하더니 재잘재잘하며 들어간다. 한국아이는 아닐 테고 누구지 궁금하다. 요즘은 같은 반 아이들을 등교하며 만나도 전처럼 과하게 반가워하지 않는데 누구길래 저리 즐겁게 이야기하며 가는 걸까.
킨더 전체에 한국어를 하는 아이는 딱 둘(우리 아이 포함)이었는데 같은 반이었고 당연히 친하게 지냈다. 그 아이는 곧 이사 갈 예정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둘이 너무 친하게 지내니 사실 걱정도 됐었다. 겨울 초입에 그 아이가 이사를 가고 꼬꼬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금세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자주 언급하는 이름이 바뀌면 요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누구에서 누구로 바뀌었구나 미루어 짐작을 하곤 한다. 그런데 어떤 시기엔 친구 얘기를 안 할 때가 있다. 그럼 약간 신경이 쓰인다. 학교에서 외톨이로 지내나? 조심스레 이번 달 테이블은 누구누구랑 앉냐고 물어보면 이름을 말하면서 본인과의 관계를 얘기해주기도 해서 한숨 놓을 때도 있다. 정작 아이는 리세스 시간에 혼자 놀았다는 얘기를 해맑게 하는 날도 있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부모 마음만 그렇다.
한국학교에서 만난 친구는 같은 반에 한국 아이들이 세 명이나 더 있다고 한다. 그 애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얘길 듣고 진심으로 부러웠다. 매주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보면 교우관계를 대강 파악할 수 있는데, 일단 킨더만 되어도 벌써 남자그룹과 여자그룹이 갈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슷한 인종끼리(정말 신기하게 주변에 보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도 이렇게 끼리끼리 어울린다) 친하게 지낸다. 아이 반에는 여자 아이가 일곱 명인데 그중 세 명의 인도 아이들이 서로 단짝이다. 그리고 백인이 세 명 있는데 그중 두 명이 단짝이다. 우리 꼬꼬는 유일한 동양인인데 백인 친구 두 명과 번갈아가며 친하게 지냈다 남자애들하고 친하게 지냈다 하는 것 같다. 한국학교 친구랑 노는 걸 보고 있으면 같은 반에 한국 여자아이가 있었다면 둘이 얼마나 단짝이 됐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은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바로 옆에 있는 공원으로 소풍을 간다고 해서 우리도 시간 맞춰 나갔다. 아는 부모들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아이와 점심을 먹고 아이가 노는 걸 보고 있을 때였다. 다른 아이가 큰 비눗방울을 만들고 있는데 채 완성되기도 전에 꼬꼬가 바로 찔러서 터뜨리고 있었다. 우리는 꼬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다른 친구들도 그러는데 왜 못하게 하냐며 꼬꼬가 울었다. 힘들게 만들고 있는데 터뜨려버리면 친구가 기분 나쁠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친구들이 터뜨려도 기분 나쁘지 않다며 또 눈물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누구도 아이에게 뭐라 하지 않았고 그냥 놀이과정의 하나일 뿐인데 우리가 너무 과도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 같았다. 아까는 엄마가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아이를 꼭 안아주고 들여보냈다.
집에 가는 길에 남편이 우리가 참 문제라며 말을 꺼냈다. 우리 스스로가 여기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면서 아이에게 교우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행동을 제지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아까 마지막에 단체사진 찍을 때 우리가 늦게 가서 아이가 화냈다며, 겉돌다가 우리가 그런 것도 놓친 거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점심도 거르고 일하러 올라가 버렸다. 전 같으면 내 탓처럼 말해서 싸웠을 것 같은데 자책이 섞이니 가만히 되짚어보게 된다.
돌아간다고 선생님이 부르길래 애 보내고 짐정리하다 보니 사진 찍는 거 같아서 달려간 것뿐인데 그게 겉돈 건가? 전체적으로 봤을 땐 그럴 수도 있겠다. 주로 우리 둘이 얘기하거나 아이하고 놀았으니까. 그런데 그 소풍에 참석하지 않은 부모들도 많았고, 온 사람들도 가족끼리 있거나 친한 가족들끼리 있거나 다들 끼리끼리 어울렸다. 우리 둘 다 한국 사람들 단체로 만나도 아는 사람 아니면 잘 얘기 안 하는 인간형인데 부모니까 그런 습성 다 버리고 모르는 사람들한테 가서 막 들이댔어야 했을까? 타인이 우리에게 호의를 표하지 않는 건 자유고 우리가 사방팔방 이야기 나누지 않은 건 문제가 되는 희한한 기준이 우리 안에 있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발동되지 않는데 미국에서만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니 아이에게도 똑같이 그런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썩 편하지 않은 자리지만 아이가 보고 싶어서 갔고, 아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약간의 근황을 나눴고, 중간에 아이가 좀 속상해했지만 잘 풀고 웃으면서 학교로 돌아갔고, 이번 이벤트도 잘 끝났구나 하고 웃으며 차에 탔는데 결말은 이렇게 한숨 쉬며 글을 쓰고 있다. 극내향인 부모로서의 사회생활이 가끔 버겁다. 무대가 한국이 아니라서 더 어렵고 남편이 원하는 부모 역할의 수준을 맞추기 어려워 답답하다. 꼭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