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의 소명
2020년 12월. 아내를 떠나보낸 이후 주변에 생각보다 많은 암환자가 있었음을 알게 됐고, 그 중 슬프지만 병세가 더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특히 1기였던 암이 진행되어 4기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순간 참 마음이 철렁하곤 한다. 이럴 때 몇 차례 같은 생각을 반복적으로 했다. ‘아 나는 최소한 더 이상 이런 절망과 예측 불가능한 두려움의 감정을 마주할 일은 없겠구나.’
아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오는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아픈 아내가 언제고 더 아파져 먼저 세상을 떠날 지 모른다는 끝없는 불안함. 전자는 이제 현실로 남았지만 후자의 아픔은 적어도 나에겐 이제 사라졌다. 근 2년, 매 순간 내가 얼마나 두려워 떨었던가. 그래서인지 더 이상 아픈 너를 더 아프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니가 사라질 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들고 안절부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건의 결과는, 아이러니 하지만 내게 위로가 됐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픈 너와 함께 있어 아픈 나와, 아픔 없는 곳에 너를 보내고 혼자 남아 아픈 나, 둘 중에 뭐가 더 힘들까.
굳이 그런걸 따져볼 필요가 있나 싶다. 다만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방 저 쪽에서 쿨럭이는 너의 기침 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이 두렵고 철렁이던 나, 그리고 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그 두려움조차 때론 그립다는 것. 그것이 오늘을 또 무심한 채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의 역설이다.
중요한 결정들을 앞두고 나는 유독 니가 더 그리워 많이 아프다. 묵묵히 끄덕이며 다 듣고 그냥 오부이 하고 싶은데로 해. 나는 오부이 믿으니까. 해주던 니가 문득 그리워져 아침부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던 감정의 상태가 조금씩 차도를 보이다가도 이런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저 그러려니 한다. 받아드려야지.
결정에 앞서 너를 데려가신 이유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를 믿는다면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내 삶의 잣대를 두는 것이 맞단 생각을 한다. 오늘도 주어진 일들을 바른 마음으로, 옳게, 묵묵히.
요새 매일 때쓰고 울고 좀 이따 아빠 미아네 내가 속상해쪄 라고 말해주는 우리 예쁘니랑. 노랑 깔맞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