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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Aug 31. 2024

내 아들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집을 멀리 떠나온 사람들은 종종 어떤 종류의 불행을 얼마 만큼 알려야 하는 지 고민에 빠진다. 병이 생겼을 때, 부모님에게 알려야 하지 말아야 할지도 그 중 하나였다. 울산을 떠나 서울에 온 지 18년이 넘어간다. 대부분의 크고 작은 불행은 조용히 내가 감내하면서 지내왔다.


병을 진단받고 2주 정도가 지나서야 전화로 병을 알렸다. 걱정이 많은 성격의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먼저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병명을 설명하고, 병의 긍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강조했다. "예전에는 병이 좀 심각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요즘은 약이 좋아져서 대부분 일상생활 가능하대. 지금도 겉으로는 티는 안나. 약을 잘 먹으면 될 거 같아."와 같은 말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괜찮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래도 병을 정확하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아내가 아빠와 통화를 따로 했다고 한다. 그 후, 아빠는 매일 아침 거의 일주일을 통곡하면서 울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가, 우리 아들이...'




  아빠의 아들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 아빠는 너무 좋아했고, 나를 보며 미안해 하기도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마냥 좋아하기 어려웠다고 종종 이야기 했다. 태어나자마자 고개를 왔다갔다 하던 아들이 너무 신기하고 기특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먹여살려야 할 지 너무나 막막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어났을 때 온 마음으로 좋아해줄 수 없었던 것이 가슴에 사묻혔나보다.


그때 아빠의 나이는 스물 여섯 살이었다. 구청과 동사무소에서 말단 계약직으로 일했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 앞 연탄을 떼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아빠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직원들이 남겨놓고 간 일을 혼자 남아 처리하고 새벽에는 정식 공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정식으로 9급 공무원이 된 것도 그로부터 6-7년 정도 이후의 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안 해본 일이 없다. 비닐커버 만드는 공장, 마늘까기, 밤까기, 아기돌보기, 마트캐쉬어, 식당, 물류센터 직원 등등. 주 5일이 당연하고, 주3-4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시대지만 2년 전까지는 일요일 말고는 쉬는 날이 없었고 공휴일에도 일을 나갔다.


언젠가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러 갔을 때, 지문이 다 닳아버린 바람에 처리도 못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유복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상에 둘도 없는 자상한 아빠, 엄마가 있어서 마음에는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빠, 엄마는 늘 미안했다. 그리고 알아서 잘 공부하고, 잘 커 준 아들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아빠, 엄마의 자랑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나를 키우느라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하며 살았던 아빠, 엄마에게 좋은 아들로 자라는 것으로 보답해주고 싶었다.




  병을 알게 된 날, 아빠는 본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생만 시켜서 그런 것 같다고 미안해 하고 슬퍼했다. 아빠는 가끔 서울에 올라와서 나의 자취방들을 보고는 늘 돌아가면서 눈물을 훔쳤다. 아끼면서 살다 보니 거쳐 온 집들 중에는 요즘 세상에 화장실이 안에 없어서 밖으로 나가야 했던 집도 있었다.


자다가 천장 벽지가 무너져 내리는 방도 있었다. 보일러가 매번 터져서 뜨거운 물을 주전자로 끓이고 페트병에 넣어 안고 자야 하거나, 이불 속에 드라이어를 넣고 자야할 수 밖에 없던 집도 있었다.


딱히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빠는 본인이 젊었을 때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들고 외로웠고, 아들은 기죽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런데 내 자식도 똑같이 그런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빠는 내가 아빠의 성격을 닮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속상해 했다. 가진 것 없었던 아빠는 누구에게나 예의바르고 성실했고,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망가질 정도로 온 힘을 다했다.


별 다른 지원도, 연줄도, 타고난 재능도 없었던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성실함과 참고 견디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누구보다 먼저 아침에 출근했다. 여러 스트레스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새벽에 깨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출근했다. 주말에도 부지런히 나가서 일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빠를 많이 닮았다.






  기적의 100일이 찾아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신생아가 그렇듯이 우리 아들도  2~3시간마다 깼다. 고요한 새벽 시간, 잠들지 않는 아들을 안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아빠와 엄마가 떠올랐다. 타임머신을 타고 1988년으로 돌아가 나를 안았던 아빠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이 아빠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의 고생으로 나는 두 분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거나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의 삶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아파트에 살게 된 건 건 내가 태어나고 26년이 지났을 때였는데, 우리 가족이 아파트에 산다는 건 꿈같은 일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조리원에서 아들을 데리고 처음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오던 날, 내 마음이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만들어진 지 30년이 지났어도, 방이 두 칸 밖에 없어도 괜찮아. 내가 앞으로 열심히 살면 우리 아들의 삶도 더 좋은 미래만 펼쳐질꺼야. 그런데, 병이 생기고 나니 모든 게 덜컥 두려워졌었다.



"우리 아들이 이제 돌이 지났는데...
'지금의 내가 앞으로 우리 아들을 잘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살면서 일을 쉰다는 생각도, 일을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10년 간 한 번도 연차를 다 써 본 적이 없었다. 첫 회사를 퇴직한 바로 다음 날 입사를 했다. 야간, 주말 가리지 않고 일했다. 처음으로 1년 휴학 하던 때도 인턴 2개로 꼬박 대부분의 날을 채웠다.


어쩌면 일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내 선택지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병을 가진 분들을 보니, 생각보다 일을 그만두시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을 하더라도 여러가지 제약이 생길 수 있다보니, 중증근무력증 재단 같은 곳에는 환자를 위한 업무 가이드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충분히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복시는 수개월 동안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주에 컵을 세 개나 깨먹었다. 마침내는 강의를 할 수록 스스로 발음이 어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유복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아들을 먹여 살리고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병의 경과에 따라 어쩌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미래이지만, 상상 만으로도 마음은 무력해졌다. '지금의 내가 앞으로 우리 아들을 잘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38년 전의 아빠가 되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빠, 진짜 막막하고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력한 마음과 몸을 가진 아빠를 둔 우리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병이 원망스러웠다. 나에게도, 무엇보다 이제 돌 밖에 안 지난 우리 아들에게 이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병이 생기고 나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선물과 같이 좋은 점도 있었다. 예전보다 아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아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퇴근해서도 정신의 반쯤은 회사에 가 있거나 일하느라 아들에게 집중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병이 생기고 나서는 집에 오면 온전히 아들에게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아들과 함께하는 모든 보통의 하루들이 너무 소중하다. 아들을 보며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어제까지 못하던 것을 갑자기 오늘 하는 날도 많다.


요즘의 아들은 자기 의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본인 손으로 하려고 하고, 뚜껑을 열어 달라거나 본인 손으로 못하는 것이 있으면 내 손을 잡아 끌어 물건에 갖다댄다.  아직 아기의 눈에는 아빠 손만 갖다대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의 눈에 아직 아빠는 슈퍼맨이지 않을까. 나도 어렸을 때 아빠의 넓은 등을 바라보면서 자라왔다. 크고 나서 보니, 아빠가 여러가지로 사회에서 서러움도 많이 받고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의 아빠는 내 눈에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어른 그 자체였다.



부모는 자신이 아기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기가 더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기의 온 세계는 오직 부모와의 세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들이 내 손을 끌어당길 때마다, 아직 말을 못할 뿐 "아빠 할 수 있어, 아빠 괜찮아"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병이 생기기 전에는 내가 아들을 키운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들이 나를 키우고 있고 나에게 힘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아들의 슈퍼맨이고,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도 마음만은 결코 무력해질 수 없다.




  병이 생기고 나서 하나 더 좋은 선물이 있다면, 아빠가 더 건강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아빠는 종종 일흔 두 살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앞으로 본인도 10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인생인데, 더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을 가끔 했다.


이제 아들, 딸도 다 결혼했고, 평생의 꿈이었던 4급 공무원으로 승진해서 은퇴도 했는데 더 이상 애쓸 필요가 뭐 있겠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프고 나니까 건강관리도 열심히 하고,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어떻게든 나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지리산에서 자리를 잡고 기반을 마련해 두고 있겠다고 했다.


환갑이 넘은 아빠도 아들을 위해서 마음만은 무력해질 수 없었나보다.


아빠는 내 아들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보다 이 말을 더 자주했다. 나도 병이 생기고 나서는 매일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무력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는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아빠는 아직도 너가 너무 좋아.
아빠가 앞으로 더 힘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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