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26. 2022

에필로그

2014.11.29 일에 시작된 '아직 걷지 않은 길'을 마치며 

원하는 정거장에 내려본 경험이 있나

피렌체에서 밤 버스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던 중이었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벽녘에 한 곳에 도착했는데 잠결에 들리는 새소리를 듣고 충동적으로 도중하차했다. 파격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그곳은 루체른이었다. 

나는 그리 모범적인 규칙 준수자는 아니지만 여행과 관련된 스케줄은 돈과 시간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꼬박꼬박 지켜나가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예외였다. 규칙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일탈(?)은 안전감을 추구하던 세계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감정들을 일깨웠다.  


 비로소 나도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릴 수 있는 의지력이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스위스 취리히 호수 옆 칼 구스타프 융의 정원 

루체른 호수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를 추구한다면서 얼마나 촘촘하게 그물을 만들어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오후에 다시 기차를 타고 도착한 최종 목적지인 취리히 호수 옆에 융(Carl Gustav Jung) 아저씨의 집에서는 고통의 끝에 맛보는 다디단 과즙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왔다. 정원에서 빛이 오는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고 날아가는 청동상의 소녀를 볼 때는 완전한 감격과 환희가 느껴지는 해방의 춤을 함께 추었다.  아를의 충격적인 사건 전에 나는 두려움이라는 물에 빠질까 전전긍긍했지만, 아를의 시간은 나를 제대로  두려움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환경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력을 키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불행이라 여겼던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강해졌다. 


리스본 알마다(Almada) 그리스도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귀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리스본에서는 상처받은 자를 위해 내어 주는 치유의 품을 느꼈다. 알파마에서 느낀 행복감은 1년은 무조건 행복할 것 같은 포만감을 선물로 주었고 그 힘 덕분에 비행기를 놓치고도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았으며 흉내 내던 옷을 집어던지고 비로소 여행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보너스로 얻은 그 시간 덕분에 들리게 된 알마다(Almada)의 올리브 나무 밑에서 비로소 고요해졌다. 기나긴 방황의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비행기를 다시 한번 더 놓치게 되면서 해야 할 일이 남았음을 직감했다. 쉽지 않았지만 어려운 발걸음을 떼기로 결심했다. 함께 가기로 했지만 혼자라도 가서 뵈어야 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어머니와 포옹을 했다. 



어머니는 시각장애인으로 내 모습을 모르신다. 또한 언어의 장벽으로 말 한마디 서로 나눌 수 없어 세밀한 감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의 품에서 따듯함을 느꼈다. 나의 고질적인 상처인 자발적인 행동은 비수용, 거절감, 버림받음이라는 3단 콤비네이션의 감정층들을 뛰어넘어 진정한 제 본성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독립적으로 서리라 결심했고 그렇게 마음먹으니 서운함이나 원망 감은 훨씬 줄어들었다. 뿌듯한 감정은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혈관 곳곳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조건 없이 사랑하리라. 조건 없이 내가 할 도리를 하리라. 

파격적인 대가를 치른 사건들은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경험이 비싼 값을 치른 까닭이리라. 돌아보면 매일매일 안전을 구했던 삶과 얼마나 다른가. 하늘과 땅의 차이다. 무사안일을 기원한 덕택 일지 무사하게 지나간 수많은 날들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징글징글하게 몸서리 쳐지던 일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사건사고는 절로 기억된다. 기억되기 위해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들은 크든 작든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기여한 공이 분명히 있다. 내 여행도 그랬다. 그리고 사건사고는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니었고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덕분에 담력도 늘어났다. 두 번이나 비행기를 놓치고도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덤덤히 말할 만큼. 나는 이제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면 안 돼, 이것만은 안된다 아프다고!! 
그 아픔만은 내가 참지 않을 거다
그렇게 격분했었는데.... 심경의 변화가 왔다. 

왜 그런 일이 너에게만 일어나면 안 되는 거니,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와야 비로소 꿈쩍도 하지 않던 자아의 견고한 틀은 그나마라도 개선의 여지가 있어지는 것이다. 넌 그것을 배우기 위해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오래오래 묵어 곰삭아진 깊은 상처에서도 향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비로소 족쇄처럼 옥죄이던 버림받음의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치유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이번에는 지연도 놓침도 없었다. 두려움에 갇히지 않는 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는 배낭을 메고 세계 방방곡곡을 다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심연의 나와 만나야 끝나는 것이었다. 2014.11.29일에 시작된 '아직 걷지 않은 길'의 여정 일기를 이제야 마친다. 꼬박 8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충격적인 사건(불의 하소)을 경험했고, 

예상치 못한 위로(물의 용해)의 시간을 선물로 받았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공기의 분리)하게 되었고, 

나의 개성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지구의 연결)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이 더해지니 같은 사건을 겪게 되더라도 덜 고통스러웠다. 때론 적극적으로 포도가 와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썩음의 과정인 부패와 발효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동시성을 경험했다.

마지막 잡냄새를 제거하는 디캔팅(Decanting 증류)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련되고 가벼워졌다.

마침내 마지막 응고의 시간이 왔다. 그 시간은 길고 길었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유한 나로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심연의 나를 만나는 일에 관해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면 된다. 두려움을 포함한 일체의 비릿한 감정 너머를 가보지 않고서 미리 예단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든든한 아군이 되어야 한다. 희망을 버리지 마라.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산사람은 모두 변할 수 있다. 


두려움 그 너머에는 더 찬란하게 빛나는 나를 만날 테니 늦기 전에 어서 가서 만나라. 당신도 머지않아 벅찬 감격과 환희의 기쁨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2022. 10.25(화). Alchemy Storyteller 장 해주 


이전 15화 유럽 최고의 휴양도시 포르투(Port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