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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rnt Kim Apr 11. 2024

곧 마흔, 로봇 룸메와 삽니다.

나이 먹고 정반대 성격의 룸메와 산다는 것. 

얼마 전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게시판에 "룸메이트"를 검색했다. "나만 이래?"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당했다.' "룸메가 안 씻어요..." "룸메가 월세를 안 내고 도망갔어요" 등등등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기괴한 룸메들과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아주 배가 불러서 터질 정도의 상태였던 것. 나는 소란은커녕 가끔 집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내 룸메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39, 미혼, 남성, ENTP, 외동. 

룸메이트는 33, 미혼, 남성, INTP, 외동. 

사실, 작년까지는 룸메이트가 한 명 더 있었다. 나보다 10살 아래의 MZ 셨다. 그러나, 그와는 헤어졌다. 이건 나중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곧 40에 남과 같이 산다는 것. 


사실 30대 후반에 결혼이나 동거가 아닌 이상 나와 다른 누군가와 사는 것은 생각보다 큰 결심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가족과 살면서도 소리 지르고 살 때가 많은데, 수십 년을 서로 다른 환경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룸메이트'로 묶여 산다는 건... 우와. 아찔한 것. 그리고 이미 30대라면, 서로의 곤조가 있을 텐데, 이걸 서로 거슬릴 때마다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심신의 안녕과 직결될 일. 



근데 왜 같이 사나? 


처음 유학 와서는 코비드 때문에 1-2년 동안 누구랑 같이 사는 게 부담이기도 했고, 한 번도 남과 같이 살아본 적이 없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과정의 생활이 매일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니라 가끔 너무 쳐지고  게을러지는 느낌이라 누구라도 같이 살면 적당한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는 갑자기 미친 듯이 오른 렌트비에 집은 좋은 컨디션으로 살고 싶으면서도 (closed gate가 있어야 한다...) 비용은 좀 줄이고 싶은 마음도 추가되었다.  



룸메가 왜 로봇인가? 


룸메는 말이 없다. 진짜 없다. 내가 묻지 않으면 먼저 말을 꺼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같이 살기 전, '같이 사는 거 괜찮을까?' 했을 때가 있었다. 방학 때 시간이 맞아 둘이 distiliery 투어를 간 적이 있는데, 출발해서 30분 넘게 내가 뭔가를 묻지 않으면 정말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Input과 output이 명확한 것. 


룸메는 별 취향이나 선호가 없다. 내가 1년 먼저 유학을 와서 처음 이곳에 온 그가 차를 사러 갈 때 도와주러 간 적이 있다. "무슨 차 원해?"에 대한 질문에 내 룸메는 "00000달러 있으니, 여기에 맞추면 돼"라고 대답했고, 당황한 딜러는 "그럼 000 모델하면 되겠다. 원하는 옵션이나 색상 있어?"라고 물었고, 내 룸메는 "없어. 그냥 빨리 나오는 거 줘" 그리고 딜러와 나는 동공지진. 1년 전 유학 오기 전부터 무슨 차를 살까, 이런 옵션을 어떨까, 이런 색은 어떨까 고민했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 내 룸메는 모든 것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굳이 남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특별한 취향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어떤 모임을 하더라도 다 참석한다. 참석해서 말을 하냐고? 안 한다. 그냥 앉아있는다. 근데, 어디 가든 있다. 그리고 좋은 건, 싫은 건 싫다고 한다는 것. 


나와는 정말 반대의 사람이다. 


그러면 나는? 


나는 맘먹으면 귀찮음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고, 사고 싶은 건 사고,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한다. 먹는 거, 매우 중요하다. 음식도 곧잘 해 먹는다. 남들에게는 까탈스럽게 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취향과 확고한 성격이 있다. 근데 뭐 다른 사람을 잘 맞추긴 한다. 가령 차를 골라도 '나는 무조건 가죽시트에 스피커는 좋아야 하고, 안전장비가 잘 갖춰져있어야 해'라는 기준이 명확하게 있고 이것저것 따져서 결정하는 편이다. 


나는 연구주제도, 일상생활 관심사에서도 다른 사람 생각도 궁금하고, 서로 의견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밥 먹을 때도 서로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가끔 친구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개똥철학도 얘기해보곤 한다. 


조합은? 


사실 많이 배운다. '와, 저렇게 말이 없어도 사람들이랑 가깝게 지낼 수 있구나. 때론 말을 안 해도 괜찮겠네. 에너지도 아끼고.'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그리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에 대해 초연하고 내 거에 집중하는 모습을 나는 많이 배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집안일, 요리, 이런 것들을 거의 내가 정하고 추진하기 때문에 나도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룸메는 싫은 게 아닌 이상 그냥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좋은 시너지가 나는 것. 


불편함은 없나? 


많은 것들을 내가 결정하고 추진해야 하고, 어쩔 때 같이 밥을 먹을 때 계속 내가 뭔가를 정해야 하는 게 불편할 때가 있긴 하다. 서로 방과 화장실을 따로 쓰기에 그런 불편함도 없고, 나름 둘 다 일찍 자는 편이라 생활 패턴에도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가끔 불편함 혹은 힘듦을 느낄 때가 있기도 하다. 나도 연구일이나 생활이 매우 바쁘고 지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룸메도 좀 적극적으로 내가 급할 때 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건 욕심이었다. 포털 커뮤니티 다른 사례를 보고 바로 치료당했다. 


사실 고마운 마음이 들 때도 많다. 나처럼 상황에 따라 역동이 있는 사람과 사는 게 그의 성격상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을 텐데, 그래도 항상 묵묵히 그대로(!) 있다. 내가 그에게 타이핑을 쳐서 명령어(?)를 입력하면, 거기에 맞는 행동과 리액션이 나온다.


종종 함께하는 보드게임의 시간, 하이킹과 공원 산책의 시간은 그런 와중에도 말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찌든 생활을 refresh 하는 요소다. 


MBTI가 한 자리만 다르지만, 성격은 정말 정 반대인 두 성인이 같이 사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뭐 가끔 답답해서 옆구리를 찔러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로봇룸메는 항상 뭔가 든든한, 소소한 재미가 있는 유학생활의 하나의 활력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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