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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박국 Jan 02. 2019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누라폰

우리는 매일 ’이해’라는 불가능한 미션 속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서 경찰에게 잡힌 사슴 밀렵꾼에게 법원이 감옥에서 1년 간 ‘밤비’를 매달 한 번씩 반복해 보라고 명령했다. ‘밤비’는 사슴 밤비가 사냥꾼에 의해 어미를 잃고 숲속의 왕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이를 보며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슴의 입장을 이해해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보다 확실하게 밀렵꾼이 사슴의 처지를 이해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건 그가 직접 사슴이 되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매일 ’이해’라는 불가능한 미션 속에서 살고 있다. 


https://youtu.be/6zmTHQXZbR4

Detroit: Become Human – Launch Trailer

플레이스테이션4에서 출시된 영화처럼 진행되는 인터랙티브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은 2038년 안드로이드가 일상적으로 보급된 된 시대. 서로 다른 상황의 안드로이드 세 명이 주인공이다. 플레이어는 번갈아 가며 세 명을 플레이하며 끊임없이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의 입장에서 가치 판단을 해야 한다. 굳이 로봇 3원칙을 들먹이지 않아도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해치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근데 만약 힘센 사람이 자신과 유대가 있는 약한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고, 그를 막을 방법이 해치는 일 뿐이라면.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었지만 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불합리한 걸 요구하고 학대를 일삼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한 것과 같은 선택을 한 유저는 전 세계에서 겨우 4%였다. 왜지? 


당신은 안드로이드 수사관 코너다. 눈앞에서는 다른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어린아이를 인질로 붙잡고 있다. 안드로이드가 인질극을 벌이는 이유는 그간 자신의 주인에게 오랫동안 학대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투입된 코너는 과연 여기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오래 학대받아온 상대 안드로이드를 이해하고 보듬어 줘야 할까. 아이를 구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 할까. 또는 이 둘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중간 지대가 있을까. 나는 철저하게 인간에게 고용된 안드로이드의 입장에서 선택했다. 상대 안드로이드를 이해하는 듯 경계를 풀게 한 뒤 빈틈을 보이는 사이에 총을 쏴 죽이고 아이를 구했다. 내 목적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고 안드로이드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으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가치판단은 챕터를 끝낸 후 흔들렸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챕터를 끝낼 때마다 전 세계에서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의 몇 %가 나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알려 준다. 내가 한 것과 같은 선택을 한 유저는 전 세계에서 겨우 4%였다. 왜지? 생명 없는 안드로이드를 죽이는 게, 아니 정지시키는 게 받은 미션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무비 (한글자막)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점점 더 어려운 가치 판단 속에 던져지게 된다. 내가 게임을 잘 못 해서 인지 코너는 자주 죽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그는 안드로이드이니까. 죽어도 다음 날이면 전의 메모리를 새로운 육체에 심고 다시 살아난다. 그때마다 사람 파트너인 행크와의 유대감은 떨어진다. 아무리 코너가 안드로이드라고 하지만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면. 인간에게 고용된 안드로이드의 입장에서 플레이하는 나도 점점 혼란을 느끼게 됐다. 초기에 안드로이드 때문에 실업 위기에 몰린 인간을 보여주던 게임은 점점 주인에게 충성했지만 학대받고 망가진 안드로이드를 보여준다.


게임은 끊임없이 캐릭터의 입장을 돌아보게 만든다. 쫓는 안드로이드와 쫓기는 안드로이드를 번갈아 조작해야 할 일도 생긴다.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아들에게 파괴당해 정지 직전까지 갔다 겨우 살아난 안드로이드 마커스는 자신들도 인간과 같은 권리를 달라며 조직을 만들고 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주인공의 곁에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평화롭게 시위해야 운동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주장하고, 나머지 한 명은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인간과 같은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무력시위를 통해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지 않은가?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Introducing the nuraphone


K는 다른 사람의 프로필보다 자신의 프로필이 유독 많이 튀어나온 것을 보며 심란해했다.


누라폰(Nuraphone)은 사람의 귀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소리를 찾아 프로필을 생성해 들려주는 헤드폰이다. 프로필은 둥그런 원으로 형상화되어 보인다. 파이거나 튀어나온 부분이 많다는 건 그 부분이 그만큼 음악이 의도한 밸런스와 다르게 들린다는 걸 의미한다. 귀는 소모품이다. 크게 듣거나 특정 음역을 자주 들으면 해당 부분이 닳아 더는 재생되지 않는다. 나는 오른쪽보다 왼쪽 소리를 잘 듣지 못하고 저음역을 크게 듣는 편이다. 누라폰은 내 귀에 딱 맞는 프로필을 만들어 들려줬다. 음질이라는 기준을 넘어 어느 헤드폰보다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단편선과 함께 한 누라폰 리뷰


누라폰의 프로필을 저장하는 애플리케이션에는 총 세 개의 프로필을 저장할 수 있다. 나는 마치 포켓몬을 사냥하듯 주변 음악가들의 귀를 수집했다. 리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만난 단편선의 프로필은 의외로 평범했다. 대부분의 음역을 고르게 듣는 귀를 가졌다. 그는 평소 음악을 좋은 음질로 크게 들을 수 없는 환경이라 했다. 어쩌면 그게 그의 귀를 지금껏 지켜준 걸지도 모르겠다. 함께 일하는 프로듀서 퍼스트 에이드(FIRST AID)는 가청영역을 넘는 서브 베이스를 자주 사용하는 프로듀서다. 역시. 프로필에서 베이스가 툭 튀어나왔다. 그 역시 자신이 들은 헤드폰 중 가장 편하고 정확한 소리를 들려준다 누라폰을 평했다. 내가 가장 수집하고 싶었던 귀는 음악가 K의 귀였다. 그의 음악은 마스터링 때 엔지니어와 몇 번 마찰이 있었을 만큼 유독 고음역이 강하다. 다른 음악과는 다른 밸런스의 자신만의 시그니쳐가 강한 댄스 음악을 들려준다. 테스트 후 그의 반응은 좀 달랐다. 프로필의 소리가 자신이 평소 듣는 것에 비해 심심한 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프로필보다 자신의 프로필이 유독 많이 튀어나온 것을 보며 심란해했다. 평소에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은 그였다. 자신은 귀도 이상하다며 이런 기술을 알려준 나를 원망했다.


다음 앨범을 제작할 땐 시험적으로 음악가와 이 제품으로 대화를 시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누라폰에서 내 프로필


집에 와 그의 프로필로 음악을 들었다. 확실히 대부분의 소리가 자극적으로 들린다. 그의 프로필로 한참 음악을 듣고 내 프로필로 들으니 오히려 심심하게 들렸다. 어느새 그의 자극적인 소리에 적응이 된 거다. 소리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비록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지만, 한편으로 누라폰이 서로의 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실제 음악가가 다른 음악가 또는 엔지니어와 자주 겪는 마찰 중 하나가 소리의 견해 차다. A는 베이스를 키우고 싶은데 함께 밴드를 하거나 프로듀서를 맡은 B는 이미 충분히 베이스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각자 다른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아무리 밸런스가 잘 잡힌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은 모두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럴 때 이 제품이 서로의 귀를 이해하고 타협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진 않을까? 다음 앨범을 제작할 땐 시험적으로 음악가와 이 제품으로 대화를 시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말고는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30대 아시아 남성인 나는 10대, 20대, 40대, 50대, 여성, 백인, 흑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머지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조건에 있더라도 서로 살아온 환경과 경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의 기술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찾고 편을 만드는 데 최적화돼 있다. 인간이란 원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필터 버블(Filter Bubble)은 자연스러운 기술의 발전일지 모른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말고는 없다. 거기에 기술이 도움을 줄 순 없을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누라폰에서 잠시 그 가능성을 떠올려 봤다. 


�기술인간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OvXyM_HIoamg3K7eeFSL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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