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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옥 Oct 18. 2023

단편소설,「귀가」 02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내 차로 가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미 당신 차에 시동을 걸어 놓았다고 했다. 아버지 차는 차폭이 넓고 길이도 길어 운전 경력이 짧은 내가 몰기에 녹록지 않았다. 엔진을 예열하는 동안 엄마는 작은 아이스박스에 각종 간식과 커피믹스 따위를 챙겼다. 뭘 그렇게 많이 담느냐고 핀잔을 줬는데 아버지가 운전하는 동안 간식을 찾는다고, 편도로 한 시간도 넘게 가야 하는데 출출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너도 배고플 거 아니냐.”

“이 새벽에 배가 왜 고파.”

“참, 기다려 봐.”


엄마는 뭔가 잊은 게 있다며 주방 뒷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손에 곶감이 몇 개 들려 있었다. 뒷집 할머니가 가을에 딴 감으로 만든 반건시라고 했다.


“너 이거, 어렸을 때 잘 먹었잖아.”


그건 내가 아니라 형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엄마는 죽은 형과 나를 자주 착각했다. 생전에도 이름을 바꿔 부르는 건 부지기수였고, 오래전 수능 땐 도시락 반찬을 바꿔서 싸 준 적도 있었다. 형과 나는 쌍둥이였지만 고등학교를 각기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친구도 다르고 수능 고사장도 달랐다. 반찬통에 든 두부조림을 보고 재수를 직감했다는 이야기를 민영은 흥미롭게 듣곤 했다. 민영은 우리가 다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엄마가 형과 나를 착각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한번은 엄마에게 이게 다 두부조림 때문이라고,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고 체하는 바람에 외국어와 수리 영역을 망치지 않았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민영이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그걸 왜 억지로 먹어서 체하냐고, 그래 놓고 엄마 탓은 왜 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런 식으로 형과 엄마에 대해 떠들다 보면 민영의 기분도 슬그머니 풀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형과 나를 착각했다는 이야기로 풀어질 만한 것도 아니었다. 민영이 유산을 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유산을 했던 만큼 오래, 간절히 기다린 아이였다. 안정기가 될 때까진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반드시 지켜 내서 자랑스레 밝히자고 다짐했었다.     


신혼 초에 민영과 나는 몇 가지 생활 수칙을 만들곤 했다. 겉옷과 속옷은 따로 세탁한다거나 분리수거는 돌아가며 맡는다는 식의, 배달 음식은 한 달에 최대 두 번까지만 시켜 먹자는 내용을 종이에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공동생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규칙 말고도 싸울 땐 존댓말을 쓴다거나 싸운 뒤의 앙금은 24시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 등등, 남들이 보면 귀엽네, 하고 웃을 법한 것도 있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결혼 생활 내내 극복 가능한 시련만 겪을 거라는 낙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는 첫 유산과 두 번째 유산을 그런대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운이 나빴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충분히 쉬고,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먹자, 조급해하지 말고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겨 보자…. 그런 말로 서로를 달랬고 또 그게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그런 게 다 무색하리만치 오래도록, 심각하게 싸웠다. 할 수 있는 가장 모진 말로 서로를 할퀴고 모욕하고 책임을 전가했다. 


“나는 이제 더는 못해.”

“그럼 하지 마,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잖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지금 나 혼자 난리 치다가 이렇게 됐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여?”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도 어느새 다시 불이 붙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젠 제발 그만 싸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현듯 다시 서로를 저주해야 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우리에겐 오직 우리뿐이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엔 민영이 당분간 떨어져 지내자고,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내가 그러자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민영은 이튿날 짐을 싸서 친구네 집으로 가버렸다. 현관을 나서면서는 가급적 연락을 자제하자고, 무엇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인지 신중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보자고 말했다.


민영 없이 혼자 지내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 붙여 놓은 생활 수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겉옷과 속옷을 분리해서 세탁하고 배달 음식도 시켜 먹지 않았다. 그러는 것만으로 우리의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거라고 믿은 건 아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 없이도 그런대로 남들처럼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 주 금요일의 분리수거 당번이 민영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참아 왔던 감정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식탁에 엎드려 오래도록 울었다. 아니구나, 안 되는구나. 민영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민영은 내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았다. 내가 아는 민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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