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육아휴직의 핵심 원천 기술

육아휴직 정리 ② - 뭐하면서 살았나요 ?

by 게으르니스트

9개월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모든 시간에 모든 하고 싶었던 일들을 고봉밥 담듯 꾹꾹 눌러담으며 살았다. 휴직 중 전화 온 지인에게 '인생의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두 배로 늘어난 시간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며 살기에는 부족했다. 도대체 뭐 하고 사느라 그렇게 바빴을까 ? 천금 만금 같았던 시간들이 마무리되어 가는 지금, 여러 지인들이 궁금해 했던 바로 그 질문에 답을 내놓고자 한다. 휴직기간의 기억들을 소중히 갈무리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육아휴직의 참맛을 위한 4대 아빠왕' 총 정리.




[ 독서왕 아빠 ]

아빠가 되면서 가지게 된 로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세상 만물을 궁금해 할 아들의 호기심에 절대 귀찮아하지 않고 영혼을 끌어모아 대답해 주리라는 것. '왜?'라는 아이의 끊임 없는 질문에도 반짝이는 눈망울을 마주보며 지겨워 하지 않고 자상하게 대답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 모습에 나의 얼굴을 투영하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듯 했다.


그것은 물론 아이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정성껏 대답해 주는 것이 아이의 교육과 애착 형성에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회사원 아빠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외모나 재력은 다른 아빠들에게 뒤쳐지더라도 이것만큼은 뒤쳐지지 않겠다는 자존심. 아이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상식, 두 가지만큼은 잘 생긴 아빠한테도, 부자 아빠한테도 지지 않으리라.


아들의 어떤 질문에도 완벽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아빠가 되기 위해, '안 본 책은 얼른 읽자. 덮은 책도 다시 보자.'는 구호 아래 교양서적의 탐독에 열을 올렸다. 출퇴근길 지하철에 서서 한, 두장 겨우 읽던 책을 앉은 자리에서 쭉 읽으니 느낌이 좋았다.


책이 두꺼워도 괜찮았다. 시간은 언제나 그대 육아휴직자의 편이니까.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 아침 시간, 방과후 교실에서 아들의 수업 마치는 때를 기다리는 시간, 이른 저녁 잠들었다가 깨어난 새벽 시간, 모두 책장 넘기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20-2.jpg 우주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해 '코스모스'를 다시 펼쳤고, 세계지도를 펼치는 아들을 위해 '총, 균, 쇠'를 다시 꺼내 들었다.




[ 놀이왕 아빠 ]

아들에게 장난감 하나 척 안겨주는 아빠가 좋을까. 아니면 허접해도 세상 어디에서 본 적 없는 신나는 놀이를 함께 하는 아빠가 좋을까. 아들의 반응으로 판단컨대 단연코 후자다. 여러가지 신기한 놀이를 가져오는 놀이왕 아빠로 변신해 보았더니 아들의 존경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놀이왕 아빠는 육아휴직 중의 얄팍한 지갑도 구원하는가 하면, 아들의 성장판을 자극해 주기도 하고,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두 세 시간씩 가뿐히 순간 삭제하는 신박한 부가 기술의 소유자다. 어차피 육아휴직자에게 시간은 넘친다. 회사에 있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분출해 보자. 만약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귀찮다면, '차이의 놀이'와 같은 육아 앱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 것도 괜찮은 방법.


예시로, 지난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칩거 기간 동안 집에 갇혀 심심해 하는 아들을 위해 개발했던 작은 비기를 소개한다. 바로 집에 있던 유아용 트램펄린을 이용한 '포켓몬스터 잡기' 게임. 포켓몬고 게임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역동감과 긴장감이 일품인 게임이다. 모티브는 우리 아빠 엄마들이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하던 과자 따먹기 놀이. (주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에게만 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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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운 여름이어서 속옷만 입고 놀았던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었습니다.


① 포켓몬스터 색칠 도안을 A4 용지에 몇 장 뽑은 후 아들과 함께 색연필로 색칠한다. 그리고 색칠한 도안을 모양대로 오려 긴 실 끝에 테이프로 붙인 후, 트램펄린 윗쪽의 천장에 아이의 키에 맞춰 늘어뜨린다.


② 아이의 머리에 마찬가지 방법으로 포켓몬스터 포획용 몬스터볼 그림을 색칠해 머리띠로 둘러준다.


이것으로 준비 끝이다. 준비에 소요된 비용은 넉넉잡고 100원 안팎. 재료 준비 시간은 종이 뽑는데 걸리는 1분 이내. 이제 몬스터볼이 된 아이는 트램펄린 위에서 포켓몬스터를 포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뛰어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색칠공부도 겸할 수 있으므로 시간 때우기도 좋고, 아이의 성장판 자극에도 탁월하다.


아이의 점프로 닿을 수 있는 곳보다 약간 높은 곳에 여러가지 높이로 매다는 것이 포인트. 피카츄나 잠만보 같은 인기 캐릭터들은 좀 더 높은 곳에 달면 더욱 좋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포켓몬스터들에 약이 오른 아이는 더욱 열심히 점프한다. 아이가 약간 어려워 할 때는 가끔씩 점프할 때 아빠가 더 높이 뛸 수 있도록 들어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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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게임을 함께 하니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예쁜 포즈 예쁜 표정을 지어주는 예쁜 아들


트램펄린이 없는 분들을 위한 자매품으로 '포켓몬스터 종이 볼링 놀이'도 있다. 마찬가지로 도안을 색칠하여 세울 수 있게 만든 후 여러 위치에 놓는다. 아이는 여러 겹으로 두껍게 붙인 종이 몬스터볼을 던져 포켓몬스터들을 맞추면 된다. 아이와 시합을 해서 더 많이 쓰러트린 사람이 젤리먹기 놀이를 해도 좋다. 물론 준비 비용과 시간은 포켓몬스터 잡기 놀이와 동일.




[ 자기개발왕 아빠 ]

소득, 경력 단절, 직장 내의 압박... 많은 사람들이 막상 육아휴직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먼저 이런 저런 걸림돌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혹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회사에 나가는게 편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갭 이어'라고 그럴 듯해 보이는 용어까지 붙여놓고 일부러 휴학이나 휴직을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사람도 생기는 마당에, 국가에서 챙겨주는 수당을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재충전할 수 있는 육아휴직은 그야말로 국가경쟁력 확보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보육시설에 가 있는 동안 휴직자는 자유다. 그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살뜰히 굴려 더 나은 사람으로 환골탈태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항상 발목을 잡았던 외국어 능력을 되짚기 위해, 육아휴직 초반부터 꾸준히 하루에 두 시간 정도씩 영어회화 과외와 일본어 능력시험 독학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제한된 소득으로 회화 학원 등의 비싼 수업료가 부담된다면, 동네의 성인 대상 회화 과외나 마트의 문화센터를 찾아봐도 좋다. 수강료가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외국어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아울러 부동산, 주식 등 재테크 서적 몇 권을 정말 밑줄 그어가며 공부했다. 어깨 너머로만 들어 알고 있던 것들을 머릿속에 확고히 하기 위해 책의 개념을 엑셀 파일에 요약 정리했고, 만약 책의 개념이 시원치 않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내용을 보완해 나갔다. 수험생 시절 정리노트가 이러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다른 길로 빠르게 태세전환을 취한 셈. 물론 재테크에 진심인 유튜브 채널들도 볼 수 있었지만, 어설픈 모래성 위에서 투자의 비기를 날리다 패가망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본 용어, 법적 규제 등 기초를 탄탄히 다지는 데 집중했다. 몇 달간 그렇게 꼼꼼히 책을 읽으며 중요한 사항들을 노트하니, 희미한 안갯속 같았던 재테크 관련 뉴스에 점점 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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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에 정리한 부동산 관련 책자의 정리노트. 클라우드에 올라가 있으니 언제 어디서나 꺼내어 다시 읽으면 된다.




[ 허세왕 아빠 ]

뭐 좋다는 이야기만 줄창 늘어놨지만 어쨌든 줄어든 소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휴직자의 목을 죄어온다. 그럴 때 자존감을 회복해 줄 허세 솔루션이 육아휴직자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과도한 지출을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은 기본.


나의 경우, 요리로 허세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었다. 워낙에 요리 말고는 재주가 전무한 지라 '인스타그래머블'한 요리 몇 가지를 골라 해먹으며 텅 빈 마음을 허황된 자존감으로 채우며 버텼다. 재료는 냉장고 안에서 굴러다니는 재료들로 충분했다. 지인에게 '지금 뭐 하냐'고 전화가 왔을 때, 허세력을 뿜어내며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요리 레시피 몇 가지를 요리 숙련도에 따라 소개해 본다. 맛은 존맛을, 조리 방법은 핵간단을 보장한다.


①단계 (라면급): 바질 페스토 파스타 (아래 분량의 재료로 약 4회 정도 허세를 부릴 수 있다.)

장점: 짧은 조리시간 (15분), 싼 가격 (2천원 내외)

재료: 파스타 1봉지 (3천원 내외), 시판 바질 페스토 (5천원 내외), 냉장고 구석에 있는 햄 및 야채 아무거나.

조리방법: (1) 파스타는 봉지에 써 있는 시간에 맞춰 삶는다. (2) 면이 삶아지는 동안 햄과 야채를 대충 썰어 후라이팬에 볶는다. (3) 파스타가 익으면 야채가 담긴 후라이팬의 불을 끈 후 파스타만 건져 후라이팬에 함께 붓는다. (4) 바질 페스토 1/4 가량을 후라이팬에 넣고 잘 비빈다. (5) 그릇에 담은 후 인스타그램용 사진 한 장을 찍고 맛있게 먹는다.


20-7.jpg 라면만큼 쉬운 파스타, 바질 페스토 파스타. 어차피 맛내기는 시판 소스의 몫이므로 걱정하지 말자.


②단계 (밀키트급): 감바스 알 아히요 (아래 분량의 재료로 약 6회 정도 허세를 부릴 수 있다.)

장점: 떨어진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칼칼한 맛, 그럴듯한 비쥬얼, 짧은 조리 시간 (20분)

재료: 냉동새우 1봉 (5천원 내외), 다진 마늘 (2천원 내외), 냉장고 구석에 있는 야채 아무거나 (버섯류가 있으면 최고), 매운 고추 (페페론치노가 베스트지만 없으면 청양고추도 무관), 넉넉한 분량의 올리브유, 소금, 후추, 식빵류

조리방법: (1) 작은 후라이팬에 깊이 1/4 가량의 올리브유를 붓고 다진 마늘을 넣은 뒤 끓인다. 불은 중약불. (2) 다진 마늘이 살짝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바로 매운 고추를 넣고 불을 줄인 후 마늘이 타지 않도록 잘 뒤적인다. (3) 매운 고추냄새가 살짝 올라오면 새우와 야채를 넣는다. (4) 소금과 후추를 뿌린다. 소금은 엄지와 검지로 두 꼬집 정도. 후추는 두어번이면 적당하다. (5) 적당히 뒤적이다가 새우가 익어서 꼬부라지면 접시에 담는다. (6) 식빵류는 토스트에 구워 바삭하게 만든다. (7) 그릇에 담은 후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한 장 찍고 식빵 위에 갖은 재료를 얹어 올리브유에 찍어 먹는다.


20-8.jpg 이제 여기서부턴 제법 요리의 영역에 진입한 냄새가 난다. 물론 핵간단한 레시피는 허장성세를 위해 나만의 비법으로 몰래 남겨두자.


③단계 (미슐랭급): 그릴드 핫 샌드위치 (허세 1회 분량)

장점: 자존감을 하늘까지 발사해 주는 놀라운 맛과 비쥬얼, 포만감.

단점: 귀차니즘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재료: 식빵 2조각 (식빵 1봉지 2천 5백원 내외), 베이컨 또는 샌드위치햄 (1팩 3천원 내외), 계란 1개, 치즈 1장, 냉장고 구석에 있는 야채 아무거나, 버터, 소스류 (마요네즈, 머스터드, 케첩 등), 피자 시켜먹고 남은 피클과 할라피뇨 (만약 없으면 빼도 됨. 대신 양파를 좀 다져 넣으면 좋다.)

조리방법: (1) 계란을 풀고 야채를 다져 넣는다. (2) 후라이팬에 계란물을 식빵 크기로 정교하게 부쳐내고, 그 옆에는 베이컨 / 햄을 굽는다. 샌드위치 안에 햄을 많이 깔수록 진한 스모키향이 입안을 감싸니 취향에 따를 것. (3) 계란과 햄이 익는 동안 토스트에 식빵을 살짝 굽는 한편, 피클과 할라피뇨를 다져놓는다. (4) 구워진 식빵 각 1쪽에 소스 1종씩을 잘 펴바른다. (5) 식빵 한 쪽 위에 계란 부친 것, 치즈, 피클과 할라피뇨 다진 것, 햄을 순서대로 얹고 그 위에 다시 식빵을 덮는다. (6) 후라이팬에 다시 불을 올리고 버터 적당량을 넣어 넓게 펼친다. 대략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넓이면 됨. (7) 샌드위치 한 쪽에 버터를 충분히 흡수시킨 후 뒤집어 다른 한 쪽에도 버터를 흡수시킨다. (8) 빵 겉면이 갈색으로 바삭하게 익으면 꺼내어 자른다. (9) 그릇에 담은 후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한 장 찍는다. 흐를 듯 말 듯한 치즈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포인트.


20-9.jpg Q: "과장님, 어디 유럽 여행 가셨어요 ?" / A: "아니, 나 집인데 ?" (이렇게 혼자 설정놀이를 해보아도 좋다. 부끄러움은 집에 혼자 남겨진 휴직자의 몫.)




9개월이라는 시간, 이렇게 참 잘도 사부작거리며 보냈다. 그 모든 시간들은 출근했었다면 노트북을 끌어안고 아등바등대거나, 타 부서 사람들과 서로 도끼눈을 하고 북치기 박치기 장구치기를 하거나 했을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육아휴직 기간은 이전의 그 인생에 없던 새로운 시간이었다. 비록 휴직기간 동안 내 세상의 반경은 집 주변 20km 주변에서 간당거렸지만, 모 회장님의 저서 제목처럼 그 좁은 세상 안에도 정말 '할 일은 많았다'. 언감생심 '돈만 넉넉히 있으면 회사 따위 당장 때려치울테다.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라는 호기마저 부릴 만큼.


회사 울타리 밖의 세상을 사는 데는 정함이 없었다. 휴직자의 시간은 휴직자가 주인이었다. 그 시간 동안 거칠 것이 없는 생각의 흐름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가능성을 탐색하였고, 이윽고 한 아이의 아빠로써 세상을 좀 더 잘 살아내 보이겠다는 다짐이 되었다. 부목처럼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살아왔지만, 아빠의 시간을 맞이함으로써 드디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육아휴직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힘은 그토록 대단했다.


어쩌면 좋은가. 휴직 전 회사에서의 일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건 분명 기분 탓이겠지. 이제 정말 '월급 루팡 폐급 인재'가 될 일만 남은 것인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시 돌아와 달라던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회사닝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제 인생'을 살뜰히 살 줄은 몰랐어요. 혹시 이러다가 남은 육아휴직 기간도 모두 사용할 지도 모르니, 복직 후에는 제발 살살 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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