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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자영 Nov 01. 2020

타인의 불행 따위가 나의 위로가 될 수 없다

진짜 나를 위한 말을 해주세요


당신의 지난 시간 동안
위로가 되었던 말이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적어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처음에 나에게 든 감정은 일종의 '무서움'이었다.


괜찮아.
역시, 너답다.
자유롭게 살아.
너는 멋있는 사람이야.


남의 불행.


수없이 포근하고 따스한 위로의 말들 사이에서 내가 본 이 단어는 너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남의 불행'이라니. 적어도 내가 아는 위로의 말에 이런 단어는 나올  없었다.



약간의 충격을 머금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이런 단어를 여기에 적었을까. 그런데 곰곰이 이 단어를 들여다보니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타인의 불행이 위로로 다가온 적이 없었던가. 누군가가 잘못되었다고 들었을 때, 괜스레 안도한 적이 과연 없었던가. 특히 나와 경쟁구도에서 치열하게 앞다투어 가던 사람이 그런 불행에 빠진다면. 이유 없이 뒤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다니던 이의 마지막이 불행하길 바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가 말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수없이 많았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나는 하늘에 빌곤 했다. "제발, 권선징악이 발현되는 사회가 되게 해 주세요!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이다. 똑같이 복수하는 대신, 나는 성난 마음을 붙잡으며 수없이 하늘에 빌었다.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래야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나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이 여전히 슬프게 느껴졌다. 고작 다른 말도 아니고, 그 수없이 많은 말들 중에, 타인의 불행 따위가 나를 위로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슬픔이 밀려왔다. 왜,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왜 우리는 이런 경쟁사회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빌게 되는, 그로 인해 위로를 얻는 사회 속에 내던져버린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슬픔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우위에 있다고 해서
절대 위로받을 수 없다.


'위로'는 무분별하게 나를 우위에 놓는 것이 아니다. 경쟁에서 나만 앞서면 된다는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경쟁사회에 내몰린다고 해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당신의 불행이 저에게 위로입니다."라고 말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 적어도 나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남의 불행이 나의 위로가 되는 시대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위로(慰勞)의 사전적 의미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준다는 뜻이다. 나는 당신의 불행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설사 잠깐의 어리석은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타인과의 경쟁이 얼마나 내 삶에 깊게 파고들었는지, 그저 그 마음이 슬플 뿐이었다.


진짜 나를 위한 위로의 말을 찾아야 한다. 타인과의 비교 따위 하지 말고 진짜 내 감정을 건드린 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위로가 됐던 말을, 다른 이에게도 더 많이 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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