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함은 늘 두 스푼 더.
어느 이에게 이런 카톡을 보낸 적이 있다.
"..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한 참 뒤에 다시 그 톡 내용을 들여다보다 알게 되었다. 내가 보낸 '보고 싶다'는 말에는 상대를 보는 내가 있고, 나를 보게 되는 상대가 함께 있는 거구나. 나의 보고픔에는 보여주고 싶음이 있었던 거였다. 두 존재-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가 시공간을 접어 한 좌표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행위, 보고 싶다는 말이 구현하는 세계를 진짜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지방도시에서 봤던 코로나 예방 플래카드에 '마스크는 내 친구'라는 문구를 보았다. 삶이 지난 1년 만에 너무나도 변했다. 잠시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 문구를 반박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마스크는 필수가 되었다. 아니 이제는 어떠한 마스크가 내 얼굴이나 귀에 걸림이 안정적인지, 내부에 이슬이 맺히는 게 덜한 제품인지 분별한다. 편의를 넘어 액세서리가 된 다양한 마스크 스트랩들이 등장했고, 마스크 끈은 동물들에게 족쇄가 된다고 하여 끈을 잘라서 버리자는 자발적인 문화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마스크'라는 하나의 상징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했다. 사람들의 이러한 문화 형성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것들이 스미듯 침투하고 또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만들어지고, 기존의 세계는 쉽게도 허물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우리는 수년 아니 수십 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 숱한 생성과 소멸의 데이터들, 그런데 그 사이를 비집고, 어떤 존재 하나가, 또렷하게 절대적 시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일... 그것이 보고 싶다의 의미가 아닌가 한다. 참 아름답다. 인간의 정기신(精氣神)을 각자의 라이프스토리로 블렌딩 하여 독립적인 향과 맛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가치롭게 느끼게 해주는 어떠한 존재를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는 일. '딸랑딸랑~' 내 마음의 문에 달린 작은 종들이 파장을 내며 귓전을 울리던 순간, 상대와 나는 드디어 접힌 우리만의 시공간에 놓이게 되었던 거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그 교감의 순간들을 통해 양자역학과 열역학 제2법칙이 완성해내는 전우주적 경험을 해왔던 게 아닌가. 그래서 그 찬란한 시절들이 늘 다른 시공간에서 여전히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가 보다.
사랑은 시제로 치자면,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두 존재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기쁜 경험들이 쌓여서 어제와 다른 우리로, 다다르고 싶은 다음 여정을 만들며 접힌 시공간의 좌표를 이동시켜 가야 한다. 그 이동이 어느 플랫폼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이제 멈춤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가만히 서서 멈추게 된 그곳의 풍광을 감상할 줄 아는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그 시간이 좀 길어진다면, 향 좋은 나만의 가게를 다시 오픈할 일이다. 어느 날엔가 말간 얼굴의 새로운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기약 없지만 지난 그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나쁘지 않겠다.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끔은 애틋함을 두 스푼 더 넣은 차 한 잔을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