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유정 Dec 01. 2020

슬픔공부 3_슬픔이와의 대화

난 너무 슬퍼서 못 걷겠어.

슬픔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봐야겠다고 다짐한 건, 올해 봄이었다. 인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와 오대산에 가게 되었다.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일들이 많았던 이틀. 산 능선이 한밤에도 훤하게 드러날 정도로 번개가 쳤고, 굵은 소낙비가 내렸고, 잠깐 그쳤을 때는 산길 가득히 안개가 짙게 깔렸고, 3월 초순이었는데 함박눈까지 내렸다. 하룻밤 묵은 작은 방의 바닥은 뜨거웠고,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반대편 벽에 편하게 기대어 바깥 풍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들었는데, 밤중에 몇 번 깨어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올해 슬픔에 대해 정리를 좀 해봐야겠어요."

"왜요?... 선생님?"

"제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왜 슬픔을 알고 싶으세요?"

"달의 뒷면까지 모두를 봐야 달 전체가 완전히 이해되는 거랑 비슷할 거 같아요. 슬픔을 이해해야 더 완전해질 거 같아요."


그날 이후로 내 감정도 그때 오대산 하늘처럼 격변의 시기가 왔던 거 같다.


동양의 불교나 유교에서 얘기하는 다섯 가지 혹은 일곱 가지 감정은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으로 정리된다. 서양에서는 심리의 고전급으로 얘기되는 폴 에크만의 감정 분류가 있다. 기쁨(joy), 슬픔(sadness), 분노(Anger), 공포(Fear), 혐오(Disgust), 놀람(surprise)으로, 이것을 생득적으로 생기는 감정 혹은 '1차 감정'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그리움, 권태, 수치심, 자괴감, 짜증, 설렘, 걱정, 샤덴프로이데(쌤통이다..하는 마음) 등 '파생적 정서'들이 있는데 문화나 개인별 다양한 상황에 의해 생겨난 '2차 감정군'으로 명명했다.


이렇듯 동서양의 감정에 대한 해석과 분류는 다른 면이 있지만, 공통적인 기본 중의 기본의 감정은 '기쁨'과 '슬픔'이지 않을까 한다.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도 주인공 라일리라는 소녀가 태어났을 때, 기쁨이가 같이 태어나고 33초 만에 슬픔이가 생기게 된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슬픔으로 인해 더 소중해지고 더 깊어지며, 유희나 방종과는 다른 '진짜 기쁨'의 가치를 찾아가게 한다. 그래서 슬픔을 통제하게 되면, 마음에 이상신호가 오게 된다.

 

기쁨이는 라일리에게 행복한 일만을 선물해주기 위해 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 슬픔이에게 그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얘기한다. 어리둥절해하는 슬픔이에게 기쁨이는 말한다.

“자, 여기 모든 슬픔은 이 안에 있을 거야!”


여러 감정들이 개별적으로 존중받고 자연스레 드러나야 함에도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기쁨이'는 다소 독단적으로 다른 감정들을 통제한다. 특히 슬픔이를 억누른다. 슬픔이 역시 자신이 라일리의 행복에 방해가 될 뿐 사라져 버려야 할 감정으로 여기며 매사 기쁨이에게 미안해한다. 그렇게 라일리의 슬픈 감정이 무시되고 억압받으면서 라일리는 균형감을 잃게 된다. 누구나에게 영화의 설정처럼 '감정본부'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슬픔이는 어떤가. 동그라미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라일리의 상상의 친구인 빙봉, 소중한 추억인 로켓을 잃어버린 빙봉은 자리에 주저앉아 슬퍼한다. 기쁨이는 빙봉을 억지로 웃기려고 하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쓰지만 빙봉은 꿈쩍도 않는다. 그런데 슬픔이가 가만히 옆에 앉아 빙봉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같이 공감해주자 빙봉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낸다.


로켓 수레를 잃어 슬퍼하던 빙봉에게, 슬픔이가 건넨 위로는 그랬다. “로켓이 사라져서 속상하지... 네가 사랑하는 걸 가져가 버리다니... 너무 슬픈 일이야...” 그제야 빙봉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삐뚤어진 라일리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도 슬픔의 감정이었다. 슬픔의 감정은 마이너스 값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이해심이나 공감, 사랑 같은 영역들이 슬픔을 통해 더 확장되며 상승의 감정선이 만들어진다. 슬픔은 기쁨이 그려낸 풍경화에 명암을 더해주어 생동감을 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가 슬픔을 돌아보고자 했던 이유도 그랬다. 돌아본 삶의 모습이 생동감을 잃은 시스템 도면도 같았다. 한 폭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오솔길, 평화롭고 낭만적인 도시의 오후 한 때... 그 정도는 그려지겠지 했는데 서울의 내 삶은 감정을 쓰지 않는 건조한 모눈종이 위의 모습이었다. 요즘은 종종 슬픔이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 눈물이 날 땐 실컷 울어!"

“난 너무 슬퍼서 못 걷겠어.”



슬픔공부3.

content : M.NET 프로그램 <THE MASTER> 중

comment : 사랑도 쓸쓸함으로 완성된다.  


[ 슬픔공부 글 목록]

1. 안 우는 어른이 되다.

2. 인상적인 눈물들

3. 슬픔이와의 대화

4. 정서 문맹에 대하여

5. 슬픔의 메뉴들

6. 슬픔을 표현할 때

7. 슬픔을 위로하는 법

8. 그래서, 무엇이 슬픔인가

이전 04화 라이프스토리 2_인생의 첫 존재들에게 배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