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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정 Feb 17. 2021

라이프스토리 3_두고두고 기억해요.

계절을 오롯이 느끼는 방편

오후 볕이 책을 가른다. 

책 속 한 줄의 문장에 사로잡힌 나는, 그 문턱을 넘어서고 싶지 않았다.  


… 자신의 생에서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여름을 스스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요즘 짬짬이 읽고 있는 법정스님의 법문 모음집 <일기일회(一期一會)>의 글이다. 하안거를 앞둔 대중 법회에서 법정스님은 중요한 이야기들을 다 마치신 후에, 마지막에 이 한 마디를 더하셨는데 거기에 내가 탁 걸려버린 것이다. 


어떠한 계절을 시작하며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구나 싶었다. 그 생각에 머무니, 마음이 막 애인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그 느낌에 마음이 적셔지도록 두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 자리를 털고 마음을 움직였을 때, 이제 나에게 진짜 봄이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살짝 들었다. 



하루를 잘 살아보려 애쓰고 있다. 특별히 무엇을 더 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일에 충실하려 한다. 매사를 오롯이 느끼는 일인 거다. 욕실에서 몸을 씻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데, 이 쉬워 보이는 과제가 매우 쉽지 않다. 직접적인 촉감에 집중하는 시간임에도 나는 그 순간 온갖 상념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 내 피부와 몸의 부분들 하나하나를 느끼고 살피는 것을 늘 놓친다. 살아온 동안 함께 해온 나의 '반려에고'들이 휘감아친다. 그런 거친 생각들이 수십 년을 끼어들었으니, 그것들을 잠재우는 일 즉 '그냥 사는 일'이 정말 만만찮은 거다. 









  

직업이 의미를 만들거나 재생시키는 '기획'일이니, 머릿속에선 연상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진짜 고수는 연상을 잡아채 하나의 브랜드로 압축시키는 기획을 해내겠지만, 나는 그런 고수는 아니므로 늘 기획 과제를 앞두고는 상념의 바다에 스스로가 입수해야 한다.  



바다수영을 좀 해본 이라면, 체온이 떨어진 젖은 몸을 모래사장에 털썩 두고 앉아 몸을 말리는 시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안다. 내게 일 이후의 휴식 시간이 바로 해변의 휴식과도 같은데, 그 행복감의 상수는 '아무 생각 없이 햇볕에 몸을 말리는'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오래 기대어온 명상도 생각을 지워내려는 생각인 듯해서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그 순간 있는 일에 집중한다. 


매 순간을 다 그러지 못해 늘 아쉽지만, '해변의 나'를 만나는 시간들을 늘리다 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에서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봄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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