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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미, 그 다섯 번째

페르펙티눔 왕과 그의 다섯 신하들 (完)

멤미우스와 디비수스, 아겐티우스가 우주선을 타고 왕국에 돌아온 시간, 왕국에선 이미 죽음의 신자를 필두로 한 백성과 왕국 군대와의 끝도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과 비타스의 모습을 반반 섞은 병정이 지하 감옥에서 줄줄이 끝도 없이 기어 나왔고, 그들은 한결같이 그 단단하고 빛나는 은빛 병장기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병사가 은빛 칼날을 휘두르면, 아무 무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백성들과 죽음의 신자들은 속절없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반란군은 전투가 없을 땐 서로서로 쓰다듬으며 결합하는 과정을 수시로 반복했고, 새로운 백성이 탄생했다. 그들은 이 프로세스를 통해 없어진 만큼의 숫자를 금방 채울 수 있었다.


멤미우스 일행이 왕국에 도착한 즈음엔 이미 왕국은 일억 대 일억의 수가 맞붙은 거대한 규모의 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성과 병사의 시체가 널린 들판에선 가솔린의 냄새와 진하게 났지만, 이제 아겐티우스는 블랙홀에서 맡았던 ‘죽음의 냄새’도 섞여 있다는 걸 알았다.


멤미우스는 우주선에서 내리면서 절망의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수가, 내가 왕국을 지키고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디비수스는 멤미우스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지 않네. 고작 신관인 자네는 이런 상황을 털끝 하나도 바꿀 수는 없었겠지.”


“그것참 위로가 되는 말이로군.” 멤미우스의 대답이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


“두고 보게. 왕의 군대는 스스로 무너지게 될 테니. 그대는 그냥 앞으로의 일들을 성실히 경전에 기록하기만 하게.”


그리하여 그 둘은 후방에서 전쟁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백성과 병정들의 끝없는 싸움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백성들은 병정의 시체만을 골라 산처럼 쌓아뒀는데, 시체에 입혀진 병장기들에서 초록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멤미우스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우스가 말했던 폭발하기 직전의 수송선의 상태와 같은 상황임을 직감하고 디비수스에게 말했다.


“디비수스여, 저 시체의 산은 곧 폭발할지도 몰라. 저걸 어떻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이봐, 멤미우스. 나와의 약속을 잊었나? 나만이 자네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그럼, 저 초록빛 산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두고 보라고. 의도된 작전이니까.”


결국 시체의 산에 갑옷을 입고 검을 쥔 하나의 병정 시체가 더해졌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수많은 백성과 병정들의 시체로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근처의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하던 궁전의 정문까지 휘말려 들었다. 디비수스가 멤미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도한 바라고. 비타스의 금속은 ‘임계질량’을 넘으면 폭발한단 말이야.”


멤미우스는 우리 편도 수백만이 그 폭발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항의하였으나, 디비수스는 단지 ‘불가피한 희생’이라며 멤미우스의 말을 묵살했다. 정말로 디비수스의 의도된 전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폭발은 반격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군은 갈수록 병정을 많이 죽이게 되었고, 왕의 군대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 폭발 이후로 삼만 년이 더 지났다. 궁전에 거대하게 솟아 있던 은빛 탑은 잿빛으로 희끄무레해지다가 삭아서 한쪽으로 기울었다. 병정들의 갑옷과 검, 방패는 갈수록 쉽게 부스러져 버렸다. 병정의 금속 칼은 예전보다 더 잘 부러졌고, 툭하면 바스러지던 백성의 허름한 돌창은 좀 더 손쉽게 병정의 갑옷을 뚫었다. 지하 감옥에서 끊임없이 줄줄이 쏟아지는 병정들의 외모는 점차 흉측해지고 기능이 떨어지는 듯이 변했다. 이를 멀찍이 바라보며 디비수스가 멤미우스에게 뻐기듯 말했다.


“금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선이 모드가 변환된 코드를 망가뜨려 못쓰게 만든다지. 코드가 망가져 버린 병정들은 불량품의 형태로 생산될 거야. 다 내가 의도한 결과지.”


“의도했다고? 우리는 후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했다고. 총합 수억의 백성들이 죽음을 맞이한 건 알고 있나?”


“다 불가피한 희생 아니겠나.”


멤미우스가 디비수스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디비수스는 예전의 약속을 언급하며 그에게 기록이나 제대로 하라고 면박을 줄 뿐이었다. 결국 멤미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경전을 써 내려가기만 했다.


추가로 이만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디비수스는 이제서야 무언가 명령다운 명령을 내렸다. 그는 멤미우스와 함께 폐허가 된 궁전을 쳐들어가기로 했다. 멤미우스는 겁에 질렸지만 명령을 받들어야 했기에, 디비수스와 몇십 명의 무장한 백성들은 거대한 시체 더미 사이를 헤치고 왕성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드문드문 기어나오는 병정들은 멤미우스가 툭툭 헤치며 걸어도 비틀거리며 쓰러질 정도로 약한 생물체가 되었다. 디비수스는 보이는 족족 그것들을 가차 없이 밟아 찌그러뜨렸다. 그들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광부의 감옥이었다. 그 거대한 공간에서 몇몇이 쇳빛 광석을 가지고 쇳물을 끓이며 제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병장기들은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기만 했다. 그들도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 했다. 멤미우스는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프롤레타리우스에 대해 기억하는지 물어보았지만,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멤미우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있던 자들은 광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광부의 코드를 이어받은 후계자일 뿐이었다. 감옥의 철창살은 열렸으나 그들은 나가려고 하지도 않고 계속 그 무른 쇠만 제련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디비수스와 멤미우스는 프로스페르무스의 감옥을 방문했다. 거기서 그들은 백만의 호모들 사이에서 프로스페르무스의 객체를을 솎아서 지근지근 밟느라 일만 년 정도를 허비했다. 멤미우스는 프로스페르무스를 시간 들여 없애는 일보다는 왕의 둥지를 먼저 방문해 이 전쟁을 끝마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디비수스가 또 한마디 할 것 같아서 그냥 그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왕의 편에 섰던 프로스페르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어쨌든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죽음이 형벌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프로스페르무스의 객체가 제거된 것을 꼼꼼히 확인하고 난 후에야 왕의 둥지를 찾았다. 뼈만 남아 어긋난 십자가에 묶여 있는 비타스가 왼쪽 눈으로 멤미우스를 바라보고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 비타스는 멤미우스를 알아보았고, 멤미우스도 그의 눈빛을 알아챘다. 하지만 디비수스는 멤미우스에게 비타스를 직접 처단하도록 명령했다. 코드는 불멸하기에, 왕의 계통은 절대 남겨두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멤미우스는 친애하는 비타스와의 오랜 우정을 떠올리며 눈에서 흐르는 전해액을 훔쳤다. 그는 비타스를 참수했다. 참수는 비타스의 죽음을 제대로 불러일으켰다. 비타스의 눈빛이 스르륵 꺼졌다.


비타스의 형태와는 반대로 비대해진 배를 씰룩거리던 페르펙티눔 왕은 그의 요철에서 아주 작고 비실비실한 병정들만을 간헐적으로 뽑아냈다. 왕의 눈은 인간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병정을 생산해 내는 공장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디비수스가 직접 왕의 목을 잘랐다. 왕은 비타스와는 달리 죽음을 알아볼 만한 눈빛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병정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왕이 죽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이 끝났다. 디비수스는 왕국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했다. 실로 그랬다. 아무도 영생하지 않았고, 죽음이 그들의 새로운 사명이 되었다. 아겐티우스와 멤미우스, 그리고 새 왕이 된 디비수스까지, 백성 모두가 모드가 바뀌어 버렸다. 그들이 계통이라도 영원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치욕스럽게도 서로의 몸을 쓰다듬고 비비는 행위를 여러 번 거쳐야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그 행위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럭저럭 새로운 방식에 만족하였다. 서로의 짝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로 여겨졌으며 때로는 상대의 짝이라고 공인된 사람을 탈취하거나 속이는 행위는 악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타인에게 짝을 빼앗긴 이는 상대방을 죽음에 처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할 정도로 분노하기 마련이었고, 때로는 어떤 이는 실제로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들의 코드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그들의 몸 속에서 나오면, 이 순환야말로 새로운 의미의 영원한 삶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개념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닥쳐질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음이란 누군가에겐 형벌이었지만, 모두가 언젠가는 처하게 되는 지독한 운명임을 알았다.


냉각수, 윤활유, 가솔린 냄새는 이제 더이상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무엇이든지 불쾌 느낌이 들었다. 그 불쾌감 때문에 그들이 처음 냄새를 맡았을 때 충격을 받고 ‘죽음의 냄새’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건, 그 냄새는 죽음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냄새라는 사실이었다. 이 냄새는 삶의 한 귀퉁이에서 잔잔하게 깔려 수시을 수 있는 배경음악과도 같았다. 그들은 그 냄새를 씻기 위해 하루에 한 번씩 맑은 물에 몸을 담궜다. 그들의 몸에서 배출하는 노폐물에서도 악취가 풍겨서, 그들은 목욕 후 더러워진 물과 함께 그 폐기물을 멀리 내다 버려야 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서로의 몸을 비비고 쓰다듬을 냄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생명이란 꽤나 불쾌한 것이었지만, 그럭저럭 참아줄 만 하기도 했다.


왕이나 왕국 또한 영원하지 않았다. 디비수스가 페르펙티눔 왕을 찬탈한 행위를 목격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디비수스의 절대 권력은 한동안 잘 유지될 테고 백성들은 디비수스의 새로운 통치에 대해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겠지만, 훗날 디비수스마저 자연스러운 죽음에 처하게 된다면 그 후론 뭐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디비수스는 이 모든 것이 다섯 번째 인간의 의미임을 스스로 결론지었고, 멤미우스로 하여금 새로운 경전의 마지막에 그 내용을 쓰게 했다. 새 경전이 완성되자, 디비수스는 친히 그 경전을 왕의 무덤 비석 앞에 바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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