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눈 내린 아침에

시&노트

by 여상

[어느 눈 내린 아침에]


오늘 아침 펼쳐본 시집은

새들이 남긴 탄식 몇 마디

들고양이 언제 다녀갔는지

배고파,라고 쓰고 간 페이지


하얗게 덮이면 되려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조심스레 행간을 열면

보이지 않게 같이 살던 것들

밤 사이에 펴놓고 간

글씨 없는 시집을 읽는다


유유자적이라는 것이

비워낸 것이 아니라

혹시 지워버린 것이라면


* * *


힘없는 것이 연약한 것에게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흰 눈밭에 새 모이 흩뿌리고

고양이 밥그릇에 넉넉히

사료 채워 놓는 일


하얗게 말 못 하는 계절

쉬이 녹지 않을 그늘 밑에서





note


어제 오후부터 시작해서 밤 사이에 내린 눈으로 마을과 들판이 온통 하얗다. 싸라기눈이 한두 번 내리다 말다 했으니 체감적으로는 이번이 첫눈인 셈이라 눈 치울 걱정은 뒤로 미루고 커피를 내려 테라스로 나선다.


고즈넉히 눈이 앉은 천변 사이로 개천물이 맑게 흘러가고, 내가 좋아하는 낙엽송들은 영화에 나오는 북유럽 숲의 전나무처럼 눈을 이고 늠름하게 서 있다. 눈이 그친 청량한 공기 저편으로 지리산 능선이 산신령 같은 영기로 세상을 감싸는 아침,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아닌가.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새 눈을 밟아 봐야지, 하며 현관문을 나선다. 아직 밥때가 되질 않았는데 저 아랫녘부터 총총 걸어온 길고양이의 흔적, 아! 나의 식객이 한 마리가 아니었구나. 썩썩 눈삽으로 눈을 긁으며 차를 세워둔 언덕까지 오르자 앙상한 단풍나무 밑으로 새들의 발자국이 신호처럼 찍혀 있다. 아! 먹을 것이 없구나...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넉넉히 채워 놓고, 땅콩을 부수어 쌀알과 함께 나무 밑에 놓아주고, 혹시나 싶어 눈 위에도 흩뿌려 두었다. 무심한 내가 오늘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다시 커피잔을 채운다. 커피 맛이 조금 다른 느낌...





#겨울 #눈 #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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