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상

시&노트

by 여상

[겨울 단상]


낮은 하늘이 앞산마루에 앉아

드문드문 눈싸라기 내보이는 날이면

나도 미루어 두었던 대답 몇 개는

거듬거듬 꺼내야 할까 보다


저만치 걷다가 문득 뒤돌아 보면

서리 내린 밭둑 위로 어수선한 발자국

흙먼지로 뛰기도 했을

여러 날의 화면들이 정겹게 얽혀있다


얼음장 아래로 고달픈 냇물

벽이 두터울수록

누울 방이 좁아지는 이치는

한나절 오돌오돌 물가에 앉아서야

겨우 한 모금 얻을 수 있었다


울창한 시절을 건너려면

초록 햇살의 빛나는 찰나와

중력을 견디어 낸 고단한 뿌리가

그늘 밑에 고요히 함께 하는 법


산그늘 드리운 찬 마루에 앉아

잎이 떠난 안 숲이 훤히 보이면

차 한 잔의 온기가 이리도 대견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가 보다


오늘 앉을자리를 찾아

편안한 방석 하나 마련하길 잘했다


정갈한 자리에 눕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은

노을이 개어 놓은 산 이불 안에

고이고이 숨겨두겠다





note


산마루까지 낮게 깔린 구름이 새벽 한 차례 싸라기눈을 뿌리고 간 조용한 아침. 오랜만에 자락길 서리를 밟으며 걸어 개천가로 산책을 다녀왔다. 선들 세차지 않은 바람과 냇가 얼음을 살짝 덮은 눈이 돋우어 낸 정취. 이른 아침 겨울 풍경이 고요하고 담담하다.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산은 가려 놓았던 소롯길을 훤히 보여주고, 소롯길을 따라가던 발길이 계산도 없이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는다.


한 때는 후회라는 마음으로 채근하던 일들이 하나하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필시 적잖이 나이를 먹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자니 지난 것들 중 쓸모없는 세월이란 없었다. 종잇장 같던 하루하루를 쌓으니 두께가 되지 않았던가. 어떤 장들은 낙서로 어수선하고, 또 어떤 장들은 뭔가를 쏟아 얼룩덜룩하고, 귀퉁이가 찢어진 장도 있고.... 모두 다 살아서 애쓴 나의 흔적들이니까.


그래서 나에게 오늘 하루가,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소중하고 고맙다. 뚝 떨어진 기온 탓인지 요즘 들어 위축되고 게을러지려는 자세를 새로 마련한 '방석'에 앉아 살살 다스려 봐야겠다.




#산책 #회상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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