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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기쁨 Mar 29. 2024

여자 친구가 생기다

From 편지 #11

Dear Myself,

좋은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요.

어제 1학기 마지막 수업을 들었습니다.
평소처럼 커피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뽑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오길래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입에 물고 있던 제 담배를 뺐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황당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저에게 그녀는 제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싫다고 합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려는데 뜬금없이 저녁에 자신한테 술을 사라고 하네요.
같은 동아리였던 그녀는 꽤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매력적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약속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 때마침 제가 눈에 띄어서 그런 건가 생각도 했습니다.
저한테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궁금했습니다.
제가 그녀한테 딱히 잘못한 기억이 없거든요.

그래서 술을 같이 마셨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그녀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왜 너만 이번 여름 방학 때 동아리에서 가는 여행을 안 가는 거야?'라고요.

제가 있는 동아리는 여행 동아리긴 하지만 솔직히 이번 여행은 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관심도 없었고 가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녀에게 이런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하려고 술을 사라고 한 건지 황당했습니다.
그냥 복도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제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갑자기 그럼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냐라고 넌지시 물어보더군요.
순간 무언가에 맞은 듯 정신이 없어지더군요.
에둘러서 남자가 너한테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다른 남자애들은 관심 없고 너에게 물어보는 거라고 화를 냅니다.
그녀에 대한 제 마음을 그 순간에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질문의 의중도 알 수 없는데 그녀와의 어색해질 관계부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솔직히 둘러댈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나도 관심이 있고 네가 좋다고 대답했더니 배시시 웃더군요.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었습니다.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터질 듯 두근 되더군요.
술기운 때문에 그랬던 걸까요?
암튼 고백 아닌 고백을 해버렸네요.

그녀도 제가 좋다고 하네요.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해 주고 호응해 주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고 말이에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호감이 가는 여성의 말에 귀 기울이고 호응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한테 어필하고 싶어 했지 사소한 것까지 들어주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예전 대학로에서 과모임 기억나냐고 합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을 즘에 어묵 먹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어느 누구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임 후 집에 가는 길에 너 어묵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며 그 말을 기억해 주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이랑 떡볶이 사준 사람이 저뿐이었다네요.

그 외에도 실제로 작은 거 하나라도 자기 챙겨준 사람은 저라고요.
제가 남자 친구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가 친구들이랑 버스킹 하면서 베이스 치는 것도 봤다고 합니다.
그게 멋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자신은 그 공연을 끝까지 보고 박수까지 쳤다고.

그래서 학교 내 모임이나 동아리 모임이 있으면 너도 참석하냐고 먼저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랑 상관없는 모임에 올 생각 없냐고 물어본 기억도 나네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만 물어봤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네요.

하여튼 제가 안 간다고 하면 그녀도 안 갔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저도 눈치가 참 없는 놈인가 보네요.

그러면서 이번 여행도 제가 안 가면 자신도 안 가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1학년 회계라 안 간다고 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안 간다고 너도 안 간다는 게 무슨 논리냐라고 물었습니다.
바늘이 가는데 실도 따라간다고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사람 참 설레게 하는 말이네요.
결국 그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더니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뻤습니다.

집에 바래다 달라고 조르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바래다주느라 막차를 타고 한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네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설레는 마음을 달래느라 잠에 들 수가 없었네요.
흥분해서 쓰다 보니 두서없이 여자 친구 생긴 자랑만 늘어놓은 거 같습니다.

일단 담배부터 끊어야겠네요.
그녀가 싫어하거든요.
항상 건강하시길.

1997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날
From Myself



여행 스케치 -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어 (1991년 음반 추억여행 (새벽에서 꿈까지))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도 참 좋아했지만 나에게 여행 스케치의 최고의 음반을 꼽으라면 2집인 <추억여행 (새벽에서 꿈까지)>과 3집 <세가지 소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들의 마지막 정규작인 9집 <달팽이와 해바라기>까지 모든 작품들을 구입해서 들을 만큼 참 좋아한 그룹이다.


몇 년 전 슈가맨에서도 나오기도 했었는데 여전히 이들의 음반을 들으면 학창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2집, 3집은 모든 곡들이 전부 좋았는데 '막내의 첫 느낌'이라든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옛 친구에게', '국민학교 동창회 가던 날'등 풋풋했던 시절의 감성들이 느껴져서 지금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4집 <다 큰 애들 이야기>에 수록된 '산다는 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곡도 참 매력적이기도 하고...



Label: 서울음반

Title: 추억여행 (새벽에서 꿈까지)

Released: 1991


조병석 - 보컬, 어쿠스틱 기타

남준봉 - 보컬, 어쿠스틱 기타

김현아 - 보컬, 건반

박선주 - 보컬, 건반

성윤용 - 보컬, 일렉기타

현정호 - 보컬, 어쿠스틱 기타

권수연 - 보컬

김은영 -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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