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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기쁨 Mar 30. 2024

다이어리를 쓰다

From 편지 #12

Dear Myself,

잘 지내고 계시죠?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잠을 자러 가는 듯합니다.
그렇게 여름 내내 우리를 뜨겁게 하느라 피곤한 듯 말이죠.

여름 방학은 사실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동아리에서 갔던 여행은 좀 특별했네요.

선발대로 갔던 저는 무서운 복학한 선배님 따라 등산로 마킹하러 갔는데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길게 쓰진 못하겠지만 어쩌면 영원히 기억될 에피소드로 남을 거 같아요.

술자리가 한참일 때 여자 친구와 몰래 밖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둘이서 산책을 했습니다.
다들 술 마시는 사람 구석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로 정신없을 텐데 모르겠죠?

CC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데 여자 친구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네요.
천생연분일까요?

이런 걸로 천생연분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저도 제정신이 아닌 거 같습니다.
동아리에서 그날 예쁜 다이어리를 나눠줬습니다.

어릴 적 생각이 나네요.
자물쇠가 있는 예쁜 다이어리에 유치하지만 짧은 생각들과 시를 남기곤 했는데 방학 내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원한 물 한잔 마시기.
3분 동안 이빨을 꼼꼼하게 깨끗하게 딱기.
더운 날씨지만 동네 한 바퀴 돌아보기.
떨어진 쓰레기를 줍어서 휴지통에 버리기.
자기 전에 머리 감기.


특별하지 않지만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소소하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조각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제 본 영화가 뭐였는지 떠올려 보기.
여자 친구랑 남산 가보기.
최근 다니고 있는 공방에서 커플링 반지 만들어보기.
비 오는 새벽길을 우산 없이 걸어보기.
낭만적이지만 감기 걸려 아팠음.
여자 친구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나의 감기약.
 
그날은 바람이 불던 날.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어머니의 잔소리.
그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바람처럼 스쳐가는 눈빛.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이어갈 수 있을까요?

마침 소원도 이뤄졌는데 이기적이지만 또 소원이 하나 생겼습니다.
작은 거 하나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풋내기 냄새가 난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은 스무 살이 가질 수 있는 저의 소중한 감정이니까요.

오랜만에 편지를 쓰다 보니 별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끄적거렸네요.
항상 건강하시길.

1997년 8월 무더위가 성급히 잠을 자러 가는 어느 날
From Myself



Enrico Rava/Stefano Bollani - Le Solite Cose (2002년 음반 Montréal Diary /B)



2001년 캐나다 Montréal 재즈 페스티벌에서 행해진 라이브 음원을 2장에 담아 Label Blue에서 발매가 되었다.

그중에 <Montréal Diary /A>는 Paolo Fresu가 참여하는 퀸텟 형식의 라이브를 담고 있으며 <Montréal Diary /B>는 Stefano Bollani와의 듀엣 라이브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 뮤지션들의 감성이 느껴지는 묘한 라이브 음원이라 ECM의 Enrico Rava의 음반도 좋지만 이때의 그의 연주도 참 좋다.


듀엣만이 가질 수 있는 담백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인터플레이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Le Solite Cose'는 평범한 것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것들 뒤로 '그러나 소중한 것들'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 진다.

 


Label: Label Bleu

Title: Montréal Diary /B

Released: 2002


Enrico Rava - Trumpet

Stefano Bollani -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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