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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U Jun 16. 2024

서두르지 말고 내 영역에서 천천히

Ep 13: 아스파라거스 푸실리와 봄도다리 쑥국

연중 봄에 나는 아스파라거스가 가장 달고 맛있다고. 푸실리면에 아스파라거스를 쫑쫑 썰어 넣고 베이비 루꼴라도 한가득. 생크림과 베이컨으로 맛을 더 풍부하게 해 준다




바르셀로나 출장, 시간의 정원, 송도 저녁 초대, 생일 저녁, 아빠와 루지, 차사고, 춘천, 엄마의 무릎. 지극히 개인적인 단어들을 늘어놓고 나니, 바깥은 벌써 볕이 기승을 부리는 초여름이 되어있다. 

어지러운 낱말들 사이에서도 쉼표 쉼표마다 제철음식을 챙겨 먹어보겠다는 결심은 잊지 않았다. 9월 변화의 시간을 앞두고 4,5,6월의 일기를 기록해야겠다 맘먹는다. 



2024.04.12

"손에 패를 다 쥐었는데, 왜 그걸 쓰지 않니?"

나는 성장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능력, 잠재력을 인생에 쏟아붓지 않는 게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성장하는 사람=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나 자신을 알아가면서 나는 외부로부터 인정받는 것보다 스스로의 납득이 더 중요했고, 앞서가며 알록달록하지 않아도 내 바운더리를 단단하게 지키는 나의 무채색 정체성이 좋았다. 백이면 백 다 좋다고 하는 기회도 스스로 의미를 못 느낄 때면 진도가 너무 더뎠다. 이런 기조 속에 변화의 흐름은 속절없이 다가왔고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손안에 다시금 패가 쥐어졌다.   



2024.04.30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이걸 타실 수 없어요."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65세 이상의 성인은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단 걸. 아빠는 루지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만큼 쌩쌩한 체력과 핸들을 조정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만 65세를 '노인'으로 지정해 두었다. 난 부모님을 한 번도 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육십오라는 숫자가 한순간에 아빠의 정체성을 가둬버린 것 같아 속상했다. 나이가 들면 이렇게 '강제' 당하는 걸까. 특정 문턱의 나이에 올라서면 내 신체의 문제로 선택의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렇게 선택지를 가져갈 수도 있는 것이구나. 65, 마음과 생각이 복잡해지는 숫자가 되어버렸다.  



2024.05.16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있었던 일'을 망쳐버린 것 같으면 이렇게 자책이 남는다. 입맛이 다 달아났지만 이런 걸로 지지말자며 누룽지 물에 쌀밥 말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래도 굶지 않고 저녁을 챙겨 먹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무척 안도되는 밤.



2024.05.31

엄마가 무릎 수술을 받고 나왔다. 엄마의 너덜 해진 무릎 연골은 엄마가 열정적으로 살아온 시간을 대변해 줬다. 소위 말하는 워킹맘이었던 엄마. 퇴근 후엔 애벌빨래를 해서 세탁기를 돌리고 4인 가족의 빨래를 널고 (당시엔 건조기란 것도 없었으니), 저녁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두 아이와 남편에게 필요한 의식주의 전반을 보살폈던 엄마. 정작 본인을 돌볼 시간은 있었을까? 스스로를 다시금 보살 필 엄마의 전성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2024.06.10

"아무것도 서두를 것이 없어요."

인도 철학을 공부하신 태희 선생님의 말이다. 이번 명상 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나의 허를 찔린 듯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내 방 안 침대에 누워서도 내 머릿속은 뭐가 그렇게 부산했을까. 회사 일들조차 모두의 조급함이 조금씩 모여 긴급이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너스레를 떨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2024.06.11

연수원의 불을 소등하자 숨어있던 별들이 모두 드러났다. 늘 평평해 보이던 하늘이 별들과 함께 둥글게 눈을 감쌌고, 하얗고 노란 별들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끊임없이 반짝였다. 소나무 잎들은 바람결에 서로 얽히고설키며 파도소리를 내고 있었다. 압도적인 경이로움. 



4,5,6월의 날들을 들여다보니, 마치 질풍노도의 시기가 다시 온 것만 같다. 나와 부모님의 입장이 바뀌고, 숨이 턱 찰만큼 다양한 일들의 나열, 와중에 회사는 화수분 쏟아내듯 각종 일들을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냥 팩트다. 사실들의 열거일 뿐, 팩트 앞에서 나는 내 감정의 키를 조정할 수 있다. 이 항해가 난항이 될지 순항이 될지는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달렸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대단한 의지와 계획은 없다. 돛바람에 몸을 맡기고 어느 날 무풍지대에 배가 멈추었을 때 비축해 둔 마음의 체력으로 바람이 없는 날을 천천히 견뎌내보려 한다. 바지런히 먹어둬야겠다.  






  

봄 도다리는 겨울 산란을 마치고 살이 부실해져서 맛을 높이고자 쑥을 넣었다는 유래가 있다

향긋한 쑥향과 은은한 된장맛, 그리고 부드러운 도다리 살의 담백함

빼놓을 수 없는 봄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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