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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게바라 Sep 24. 2018

나의 아저씨   제 11 회

좋아서

11회가 시작되면
지안은 동훈에게 선물했던 슬리퍼를 버립니다.
동훈은 상무가 되기 위한 인터뷰 준비에 분주합니다. ​


​이 씬은 삼형제 중 첫째, 상훈의 대사입니다.
실제 우리네 아빠에 가장 가까운 남자가 상훈일 겁니다.
그런 상훈이 드라마 말미에 '기똥찬 순간'을 만듭니다.
지안과 관계된 일이기에 여기에 옮겨적습니다.



씬. 정희네

상훈         내가 내년이면 오십이다. 오십. 오십... 놀랍지 않냐? 인간이 반세기 동안 아 무것도
​안 했다는 게. 아무것도 안 했어. 기억에 남는 게 없어. 학교 땐 죽 어라 공부해도 밤에 잘려고 누우면 삼시 세끼 챙겨먹은 기억 밖에 없더니 이게 딱 그 꼬라지야. 죽어라 뭘 하긴 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없어.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 그냥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대한민국은 오십년 동안 별일을 다 겪었는데 인간 박상훈의 인생은 오십년간 먹고 싸고 먹고 싸고 징그럽도록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기훈         본론으로 들어가라. 그만 좀 먹고 싸고.
상훈         너 듣지마. 새꺄, 너 절루 가. 따로 앉어. 하루 종일 저래, 저거 그냥.

​바자리에서 테이블 자리로 술잔을 들고 가는 기훈.

정희          앞으로도 열심히 먹고 쌉시다.
상훈          결론은 그게 아니고, 그거는 기본이고. 그래서... 기억에 남는 기똥찬 순간 있어야 할 거 같애.
뭐라도 해서 만들어 넣어야 그래야 덜 헛헛할 거 같애. 그래서....

기훈이 안주를 가지러 왔다갔다 하자, ​

상훈         아이 이자식이 자꾸 왔다갔다 해서 분위기 다 망치고.. 멋진 얘긴 데... 그래서....
(동훈에게) ​뭐할지 안 물어보냐?
동훈         뭐 할 건데?
상훈         정희야, 나 똥집 하나만 해줘.
 
옆에 있는 동훈은 딴 생각에 빠져있다.
 
 
씬이 바뀌면,
동훈은 정희네 앞에서 담배를 들고 서성입니다.
정희의 말을 빌리면
"그냥 들고만 있지 피는 것 같진 않던데..."

그렇습니다.
동훈은 담배를 피는 것이 아니에요.
지안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곧이어 동훈에게 이런 일까지 일어나네요,
아내 윤희가 동훈이 도준영과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동훈은 준영에게 내세웠던 조건이 하나 있었죠.
그것은 윤희가 자신이 도준영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을 모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윤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과 살 수 없을 거라고.
동훈이 걱정했던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랬던 그인데 윤희가 도준영과 통화하는 내용으로
윤희가 동훈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날 동훈은 출근하려 지하철을 기다리다 친구 '겸덕'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억지로 산다.>
<날아가는 마음을 억지로 당겨와, 억지로 산다.>
 
겸덕에게 온 답문은 이러합니다.
 
<불쌍하다. 니 마음.>
<나 같으면 한번은 날려주겠네.>
 
 
이 문자를 받은 동훈은 기다렸던 지하철에 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그 버스 안에 흐르는 음악이 절묘합니다.
 
https://youtu.be/pey29CLID3I
 

겸덕의 일을 도와주고,
같이 식사도 한 동훈이 겸덕과 텃마루에 걸터앉아있습니다. ​
 
 
 
씬. 절

동훈          안 쓸쓸하냐?
겸덕          쓸쓸... 맨날 말하잖냐? 여기도 사람 사는 데라고.
동훈          학력고사 만점에 뭐해도 됐을 놈이...
겸덕          아이고 그놈의 만점 얘기 좀 그만해라. 여기서도 그 얘기 아주 지겹다. 넌 어 떻게 지내는데?
동훈          망했어, 이번 생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겸덕          생각보다 일찍 무너졌다. 난 너 한 육십은 돼야 무너질 줄 알았는데.
​내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올 때 결정타가 너였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봤자 박동 훈 저 놈이다. 드럽게 성실하게 사는데 저 놈이 이 세상에서 모범답안일 텐 데. 막판에 인생 드럽게 억울하겠다.
동훈         (일어나는) 그냥 나 하나 희생하면 인생 그런대로 흘러가겠다 싶었는데.
겸덕         희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육이오 용사냐 임마. 희생하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이뤄논
​것은 없고 행복하지도 않고 희생했다 치고 싶겠지. 아이 그렇게 포장하고 싶겠지. 지석이한테 말해봐라. 널 위해 희생했다고. 욕 나 오지. 기분 드럽지. 누가 희생을 원해. 어떤 자식이 어떤 부모가 아이 누가 누구한테 그지 같은 인생들에 자기 합리화. 쩐다, 임마.
동훈         다들 그렇게 살아, 임마.
겸덕         아이 그럼 지석이도 그렇게 살라 그래. 그 소린 눈에 불나지. 지석이한텐 절 대 강요하지 않을
​인생. 너한텐 왜 강요해.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희생이란 단어는 집어치우고. 상훈형하고 기훈이 별 사고를 다 쳐도 어머니 두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거 못 봤다. 그 놈의 새끼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매일 욕하셔도 마음 아파하시는 거 못 봤어.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너 때문에 매일 마음 졸이시지. 상훈이 형이나 기훈인 뭐 어떻게 망가져도 눈치 없이 뻔뻔하게 잘 살까 하시니까. 뻔뻔하게 너만 생각해. 그래도 돼.
 
 
 
한편, 지안은 도준영에게 불려갑니다.   
 
 
씬. 도준영 오피스텔

​준영         박동훈 왜 안 나왔어?
지안         절에 갔어요. 친구한테.
준영         왜?
지안         토낀거지. 내가 들이대서. 좋아한다고 들이댔어요. (사온 쿠키를 씹는)
준영         그래서?
지안         맞았어요. 상무심사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매일 인터뷰 시뮬레이션한다고 밤마다 호텔 방에 쳐박혀 작전짜고 나랑 밥먹을 시간은 없고, 별수 있나? 들이댈밖에.
들어봐, 도청. 들어봐. 그때 거 있을 거 아냐?

도청을 트는 지안....

지안               내 뒤통수 한 대만 때려줄래요? 보고 싶고 애타고 그런 거 뒤통수 한 대 맞 으면 끝날
 ​감정이라면서요. 끝내고 싶은데 한 대만 때려주죠. 하. 그지 같애. 왜 내가 선물한 슬리퍼 안 신나 신경 쓰는 것도  그지 같고. 이렇게 밤늦게 배회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그지 같애.
동훈              집에 가. 왜 돌아다녀? 어.
지안              그러니까 한 대만 때려달라고. 끝내게. 왜 내가 끝내지 않았으 면 좋겠어?
​나 좋아하나?
동훈             너 넌...
지안             넌 뭐?
동훈              넌 미친년이야.
지안              어, 맞아. 미친 거야. 그러니까 한 대만 갈겨 달라고, 내 뒤통수.
​정신 번쩍 나게. 어떻게 있단 인간을 좋아했나 머리 박고 죽고 싶게. 때려, 끝내게. 안 때리면 나 좋아하는 걸로 알거야. 동네방네 소문 낼 거야. 박동훈이 이지안 좋아한다고~!

준영         희한해. 왜 여자들은 박동훈을 좋아할까? 남자들 사이에선 그저 그런 놈인 데. 왜 좋아해?
​어디 이유나 한 번 들어보자. 진짜 궁금해서 그래. 왜 좋아 해?
지안          망치고 싶은 거지. 난 착한 사람 보면 이상하게 발로 차버리고 싶던데, 울리 고 싶고.
​그쪽처럼 나쁜 사람한테는 아무 감흥이 없는데 착한 사람 이상하게 망치고 싶어. 나와 같은 부류로 만들고 싶어 그런가? (과자 씹는) 자버릴까 요? 박동훈이랑. 시간도 없고 그거밖에 없지 않나?
준영         자겠니? 박동훈이.
지안         술먹이고 약먹여서.
준영         해봐. 어디 할 수 있나 보자.
 


​겸덕에게 갔다온 동훈은 더 이상 참기만 하지 않을 거 같아요.
참는 게 몸에 해롭다는 걸 느꼈나봐봅니다.
그래서 이전의 동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입니다.
바로 ​이 씬이지요.

 

​씬. 대표실
대표실에 들어온 동훈, 문을 걸어잠그고 도준영 앞에 선다.

동훈         사람 말 안 듣지 너. 내가 안 다는 거 윤희는 모르게. 그게 어려우냐?
준영         내가 말한 거 아니에요. 윤희가 먼저 알고 찾아왔어요. 공중전화 선배한테 걸린 거 아니냐고.
동훈         (소리치는) 아니라고 했어야지! ​

​동훈이 소리쳤다. 회사에서. 그것도 대표인 도준영에게.
도준영 놀라 본다.
사무실 밖 지안을 비롯한 직원도 놀란다.

동훈         물어본다고 슬슬 다 불어. 회장님 앞에서 네 아구창 날리고 밟아 죽여버리고 싶은 꾹꾹
참아가면서 그거 하나 말했는데, 물어본다고 다 불어? 어, 어? 안 듣는 거야, 이 새끼는 사람 말 안 듣는 거야. 남 얘기는 관심 없는 거야, 그지? 됐다. 내가 너 밟아버릴 거야. 넌 내 손에 망해야 돼. (돌아서 가려는데)
준영         저기요. 우리 그냥 터트리죠. 그게 피차 속 편할 거 같은데. 진짜 못 해먹겠네.
어디 부장나부랭이가 대표이사실 쳐들어와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달려와 도준영에게 주먹을 날리는 동훈.

이때, 문을 따고 들어온 윤상무가 소리친다. "야이, 개새꺄~"​



​이 소란을 일으키고 자리와 앉는 동훈은 편안한 모습입니다.  
근데 그런 그가 서랍안에 넣어둔 쇼핑백, 지안이 선물한 슬리퍼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동훈은 소극적으로 담배를 피는 척 지안을 기다리던 그의 모습이 아닙니다.
 ​


씬. 길
귀가하는 지안을 쫓아온
 
동훈         슬리퍼 어딨어? 슬리퍼 어쨌냐고?
지안         쪽팔려서 버렸어요. 뒤통수 한 대 맞고 나니까 정신 번쩍 나던데요.
동훈         그렇다고 버려? 내가 슬리퍼 한 짝도 받지 못 할 사람이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했어?
지안         그냥 뒀으면 신었구요? 내 말 잘 들어요. 내일 출근하면 사람들 많은 데서 나 짜르겠다고
​얘기해요. 자꾸 들이대서 못 살겠다고 처음 아니라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그렇게 얘기해요. 느닷없이 키스하고 별 짓 다해서 짤라버리겠 다고 경고했었는데, 불쌍해서 조금 도와줬더니 지가 좋아하는 줄 알고 또 들 이대더라고. 다 말해요. 난 가만있을 테니까. 다 사실이니까. 그냥 하는 얘기 아니에요. 어차피 한 사무실에서 얼굴 보기 불편한 사이 됐고 회사에서 나 때문에 골치 아픈 거 같은데 다 얘기하고 그냥 짤라요. 난 아쉬울 거 없으니 까. (돌아서 가는)
동훈         안 짤라! 이 나이 먹어서 좋아한다고 했다고 짜르는 것도 유치하고 너 자르 고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면 아는 척 안 하고 지날 갈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소화 안 돼. 너 말고도 내 인생에 껄끄럽고 불편한 인간들 널렸어. 그딴 인간 더는 못 만들어. 그런 인간들 견디며 사는 내가 불쌍해서 더는 못 만들 어. 그리고 학교 때 아무 사이 아니었던 애도 어쩌다 걔네 부모님 만나서 인 사하고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아니게 돼. 난 그래. 난 니 네 할머니 장례식에 갈 거고, 너 우리 엄마 장례식에 와. 그러니까 털어. 골 부리지 말고 털어. 나두 너한테 앙금 하나없이 송과장 김대리한테 하는 것처 럼 할 테니까 너도 그렇게 해. 사람들한테 좀 친절하게 하고. 인간이 인간한테 친절한 거 기본 아니냐? 뭐 잘 났다고 여러 사람 불편하게 퉁퉁거려. 여기 뭐 너한테 죽을 죄진 사람 있어? 직원들 너한테 따뜻하게 대하지 않은 거 사실이야. 앞으로 내가 그렇게 안 하게 할 테니까 너두 잘 해. 나 너 계 약기간 다 채우고 나가는 거 볼 거고 딴 데서도 일 잘 한다는 소리 들을 거 야. 그래서 십년 후든 이십 년 후든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 할 거야. 껄끄럽고 불편해서 피하는 게 아니고 반갑게 아는 척 할 거라고. 그렇게 하자. 부탁이다. 그렇게 하자. (가려다가) 슬리퍼 다시 사와.

 


동훈은 이렇게 직면한 문제에 그대로 부딪칩니다.
그러나 아내, 윤희 일에만은 그럴 수 없는 동훈입니다.
애써 외면하는 동훈입니다.
동휸은 윤희와 마트에 갑니다.
마트에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차안에 도준영과 함께 밀월을 즐기던 오피스텔 출입증이 발견됩니다.
이마저도 애써 모른 척 하는 동훈입니다.  ​
​이제 참을 수 없는 건 윤희입니다.
마트에서 돌아온 윤희는 동훈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씬. 동훈 집
안방 문짝을 주먹으로 치는

동훈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하고 많은 놈 중에 왜? 왜? 왜?

​"왜?"를 외칠 때마다 문짝을 치는 동훈.
방에 물건을 내던지며.

동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피가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엎드려 우는 동훈.


동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 핀 순간 너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이런 대접 받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죽어버리라고.
 
 
 
이 부분에서 연출이 특히 좋습니다, 참 좋아요.
동훈의 가장 아픈 순간을 고스란히 지안이 짊어지는 이 장면.
할머니에게 동훈을 설명하는 이 장면.
이 장면에서 잊을 수 없는 수화가 나옵니다.
 
주먹을 코에 말아쥐는 이 수화.
"좋아서."
 
 
 
씬. 요양원
 
지안        (수화) 그분은 아마 승진하실 거 같아.
할머니     (수화) 근데 왜 울어?
지안        (수화) 좋아서.
나랑 친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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