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접어들었던 순간부터 주위에서는 "이제 생일이 와도 아무 감흥이 없다."는 한탄이 종종 들렸다.
나 또한 무의식 중에 그 말에 힘껏 맞장구치며 "맞아 맞아."라며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 감흥이 없다. 이젠."이라는 흔하디 흔한 말을 입버릇 마냥 내뱉곤 했다.
나중에 나이 더 먹고 되돌아본다면 지금의 나이도 어리디 어린아이 같이 느껴지겠지만, 나이란 건 상대적인 거니까.
내게도 생일만을 꼬박 기다리며 설레어하던 동심 가득 찬 시절이 있었다.
그 설렘이 지나쳤던 초등학교 2학년 땐, 반 아이들 모두에게 직접 가위로 삐뚤빼뚤 오린, 반짝이 풀이 잔뜩 번진 생일 초대장을 돌렸다.
유독 기억에 남는 생일이었던 그날은 1998년 2월 11일로 예상된다.
1998년부터 2000년도까지 방영했던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가 동네 아이들을 모조리 몰고 와 집에 들이닥치던 순간과 흡사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시트콤만큼의 100명에 가까운 인원들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는 대략 25~30명 정도의 아이들이 놀러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미달이 집처럼 커다란 2층 집이 아닌, 30평대의 아파트였기에 공간에 대비한다면 비슷한 인구 밀도를 연출했을 것이다.
10명 이하의 인원을 예상했던 엄마는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올 거라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에게 SOS를 요청했다. 철없던 손녀의 생각 없이 뿌린 초대장으로 인해 할머니 또한 우리 집으로 출동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는 엄마와 할머니가 직접 준비한 음식들과 더불어 어느 피잣집과 치킨집 사장님의 정성이 들어간 피자와 치킨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약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우리 엄마와 할머니가 엄청난 진땀을 뺐을 상황이 상상이 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라는 어린이는 생일에 잔뜩 심취해 아끼는 옷을 입고, 케이크 앞에 앉아 촛불을 후~하고 불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진 잘 기억이 안 난다. 극강의 텐션을 가진 상태였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놀러 온 아이들 중 남자아이들은 모여서 미니카, 딱지 등으로 자신들만의 놀이에 심취해있었고, 나는 여자아이들과 둘러앉아 문방구 사장님 혹은 아이들의 엄마들이 정성껏 포장했을 선물들과 카드들을 하나씩 풀어헤치고 있었다. 선물은 대부분 '학용품 세트'였다. 비슷비슷한 학용품 세트였지만 받아도 받아도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속에 담겨있는 알록달록 연필들과,번개 펜과 향기 펜들은 보기만 해도 벅찼다.
그중 가장 인기 있던 '미미 옷 입히기' 선물을 뜯을 땐, 아이들은 극강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당장 꺼내서 미미에게 옷을 입히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픽 나올 만큼 유치한 상황이지만, 당시엔 생일 주인공도, 초대받은 이들도 굉장히 진중하게 진행한 선물 개봉식이 었다.
"밖에 눈 온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외침에 아이들은 내기라도 하 듯 각자의 신발을 찾아 신고 뛰쳐나갔다. 겉옷 입고 나가라는 엄마의 성화에 몇몇은 다시 돌아가 똥똥한 잠바를 대충 걸쳐 입었다.
어린이들 답게 아파트 단지 뒤쪽의 작은 언덕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이미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곳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놀았고, 누군가 주어온 박스를 펼쳐 타고 눈이 쌓여가는 언덕에서 썰매를 즐겼다.
그때의 나에게 행복한 생일을 선물해 주었던, 그 날을 함께 보낸 아이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 아이들의 소식을 알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이 온다고 해도 그때처럼 눈 속을 해맑게 뒹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처럼 눈 온 뒤의 출, 퇴근길을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이, 해맑았던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 맞이한 생일들은 항상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소소하게는 가족들이 내 생일을 깜빡해 서운한 적도, 늘 내가 먼저 생일을 챙겨주던 지인이 내 생일을 소홀히 대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특히 회사에 소속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생일에 대한 감흥이 점점 사라졌다. 가까운 동료들의 축하 속에 잠시 웃음을 짓기도 했으나, 생일이라고 해서 평소 벅찼던 상황들이나 무례한 행동들이 날 비켜가진 않았다.
외부로부터 내 소중한 생일의 행복이 침해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생일만큼은 스스로 즐거워 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업무상 심각하게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생일에는 연차를 써서 그날만큼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부터 벗어나려 했다. 또 그 하루만큼은 부정적 감정을 되뇌거나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렇게 자의적 노력과 더불어 소중한 이들의 타의적인 노력이 더해진 나의 생일은 대체적으로 행복했다.
첫 30대를 맞이하던 몇 년 전의 나는, 더 이상 생일에 설레어하면 안 될 것 같은 우스운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체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10대, 20대 때보다는 감흥이 준 것도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일은 1년 중 어느 날 보다 유치한 감정, 즉 동심을 느낄 가능성이 높은 날이었다. 나는 그 감흥을 나이라는 명목 하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 살기 바빠 자주 못 보는 친구들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을 땐 고마움을 잔뜩 표현하려 했고, 가까운 지인들과 생일을 핑계 삼아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밥과 커피를 먹으며 못다 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제는 큰 초 2개만 꼽는 게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린 케이크 앞에서, 돌잔치 주인공이 된 아기 마냥 활짝 웃으며 초를 불었고, 그들이 성심껏 골라준 선물들과 카드들을 펼쳐보며 소녀 감수성에 젖기도 했다.
나 또한 소중한 이들의 생일을 최대한 잊지 않고 챙기려 한다.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서로의 노력들이 차곡차곡 쌓여, 일상 속 작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곤 했다.
2021년 이번 생일은 코로나로 여러 명이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라 많은 이들을 만나진 못했지만, 부모님 그리고 남편과 따듯한 집밥을 먹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만나지 못한 지인들로부터 받은 축하 메시지와 선물 쿠폰들을 열어보며 찡한 고마움을 느꼈고, 회사 내 떡볶이 메이트 Y양이 직접 가위질하고 풀칠해 작성한 대왕 편지지를 받아 보며 진짜 초등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생일이라고 설레어하는 것은 자칫 어린아이의 유치한 감성으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메마른 현실을 살아가는 것을 잠시 멈추고, 생일 하루만큼은 조금 유치하더라도, 덜 메마른 어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1년 중 생일 하루만이라도 유치한 하루를 보내며 소소한 동심을 느끼기 위해 난 앞으로도 발버둥 칠 것이며, 내 주위의 소중한 이들 또한 유치한 생일을 보낼 수 있도록 빌어 줄 것이다.
평소 같았다면 "아이씨, 짜증 나!"와 같은 탁한 대사를 내뱉으며 신경질 적으로 베란다를 치웠을 텐데, 그날만큼은 "내 생일 전야제라고 축하해주려나 봐. 꼭 토이스토리 같다."라는, 맑디 맑은 정신세계를 장착한 대사를 날렸다. 옆에 있던 남편은 잠시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토이스토리 상황극에 정성껏 임해주었다.
곧 밀려오는 민망함에 몸이 베베 꼬였지만, 앞으로의 무수한 유치한 생일을 맞기 위해선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