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의 순기능

물 멍 활용하기

by 안나

결혼 전 내가 하던 설거지라곤 가끔 엄마를 도와주기 위한 깨작거림에 불과했다. 대충 싱크대를 쓰윽 보곤 적당량이다 싶으면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라며 빨간 고무장갑을 팔에 쓱 끼곤 했다. 대학 시절 카페 알바를 할 때 커피 또는 에이드 등의 음료를 제조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하던 일은 '설거지'였다. 그때의 설거지는 싫기도 좋기도 했다. 가끔 대화하기 꺼려지는 고압적인 성향의 매니저가 있는 날이면 조용히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며 그와의 대화를 차단하곤 했기에 유용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결혼을 하고 난 뒤, 남편과 내가 둘 다 9 to 6 회사원의 신분일 땐 주로 나는 밥 담당, 남편은 설거지 담당이었다. 하지만 오늘 부로 퇴사 10일 차, 나름 소일거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회사원 신분인 남편보다는 여가시간이 많아진 내가 평일엔 식사 준비와 더불어 설거지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처음엔 설거지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다.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처럼 느껴졌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고생스럽게 하는 듯했다. 딱히 재능이 없더라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찮게 본 것이다.


성격상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있는 꼴을 못 보기에 식사를 하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편이다. 제육볶음을 먹고 난 이후의 빨간 기름이나, 간장과 참기름 등의 찌꺼기 등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재빠르게 고무장갑을 끼곤 그릇의 때를 벗기고 광을 낸다. 처음엔 눈에 띄는 순서대로 닦아 냈다면 지금은 요령이 생겨 그릇, 수저, 냄비, 프라이팬 등 종류별로 분류 한 뒤 씻어낸다. 식기 별로 수세미도 다르게 사용해주며 최대한 손상이 없도록 어루만져준다. 요령이 생기고 나니 소요 시간이 단축되었다.


설거지에도 좋고 싫은 류가 확실하게 구분된다. 감당 안될 만큼의 양, 그러니까 평온하게 물 멍 (물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행위)을 때리다가 어느 순간 '아 허리 아파.', '언제 끝나 도대체!' 등의 불평이 나올 만큼의 많은 양을 처리해야 하는 설거지는 싫다. 끝내고 나면 뿌듯하긴 하지만 허리를 주먹으로 여러 번 두드려 줘야 한다. 기름기 없는 디저트와 커피류 혹은 과일 등을 까먹은 뒤 하는 설거지는 상쾌하다. 남은 커피를 한번 쓱 버려주면 비릿한 하수구 냄새도 잠재워주는 기분이다. 또 주체적으로 하는 설거지는 좋은데,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설거지는 싫다.


설거지를 할 땐 잡생각이 없어진다. 눈앞의 달그락 거리는 식기들에 집중하고 구석구석 안 닦인 곳이 없는지 살피느라 생각의 회로가 단순화된다. 나 같이 온갖 상상과 걱정거리를 머릿속에 꽉 채우고 있는 사람에겐 멍 때리기에 제격인 셈이다. 종종 격해졌던 감정이 설거지를 마친 후 잠잠해지기도 한다. (가끔 화가 많이 나 있을 땐 달그락 소리가 쨍그랑!으로 변이 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 행위가 한 끼의 마무리임과 동시에 나와 내 가족의 위를 채워줄 소중한 음식을 담아내기 위한 첫 준비에 속하도 하니, 나를 돌보는 행위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주말 오후, 창문 밖 햇살을 바라보며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느긋하게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실 때면 느닷없이 '아, 사는 거 별 거 없다.'라는 뻔한 생각이 들곤 한다. 제 때 내 배 따듯이 불려주고, 더럽혀진 식기들을 깨끗하게 광내 기름 냄새를 빼주고, 수고했다는 의미로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넣어주고 나면 나만의 템포로 순간을 보냈다는 생각에 꽤나 뿌듯해는 것이다.


귀찮고, 하찮은 행위로 설거지를 바라보던 내 시선이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은 현재. 설거지의 순기능,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 마음속 찌든 때를 씻어 내준다는 점을 일상 속에서 잘 활용해보기로 한다.




※ 이 글에서 표현한 '순기능'이라는 것은 설거지의 양, 자발성 여부 등에 따라 상이할 수 있겠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keyword
이전 07화간헐적 각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