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 환상의 호흡

by 안나

탁 탁 탁 탁-


2022년도 3월 9일 수요일. 대통령 선거일이다. 동시에 쉬는 날이기도 하고.

열심히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까지 무시한 뒤 다시 단잠에 빠졌는데 집안을 울리는 이 소리에 눈이 슬며시 떠진다. 칼이 도마를 치는 소리라는 것에 확신이 들자 벌떡 일어나버렸다. A (남편) 혼자 뭘 먹으려는 게 틀림없다. 안방 문을 훽 열고 부엌으로 향하니 작은 접시에 빨간 껍질을 벗은 노란 사과 조각들이 보인다. '겨우 사과 깎는데 그런 요란한 소리가 날 일은 없을 텐데'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침마다 양치 후 물 한 컵, 사과 한 개를 먹는 내 습관을 고려한 A의 작은 노력에 감동이 인다.


"일부러 도마 소리 냈어. 그래야 나 혼자 뭐 먹는 줄 알고 뛰쳐나오니까."

막 감동을 느끼려던 차 A의 놀림에 부은 눈을 흘겼다. 내 특성을 모두 간파하고 있다는 듯 우쭐한 미소를 보이는 A는 곧 욕실에 가 양치를 한다. 양치를 마친 A가 나오자마자 내가 욕실로 들어가 확인해보는 것은 치약이다. 치약의 끄트머리부터 짜 올리는 나와 반대로 A는 입구 쪽만 쭉 누르곤 한다. '결혼하면 치약 짜는 방법으로도 싸운다'는 우스갯소리가 한 때 우리에겐 꽤나 심각했던 언쟁이던 적도 있었다. 이젠 A 또한 제법 내 방식에 따라주기도 하고 나 또한 치약 내용물이 고르게 남아있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치약 끝부터 짜 올리는 거야 내가 하면 되는 거니까.


물 한 컵과 A가 깎아둔 사과를 맛있게 먹은 뒤 퉁퉁 부은 꼬질꼬질한 모습을 지우기 위해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다. 화장을 공들여 한 뒤 보라색 드라이기를 집어 열심히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내 뒤에 곧이어 나타난 A는 검은색 드라이기를 집어 든다. 각자 취향에 맞는 드라이기다.


투표소로 선거를 하러 가는 길.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나왔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기본권을 행사했다는 뿌듯함에 가뿐한 발걸음으로 교문 밖을 빠져나오며 "우리가 이 동네에서 계속 살고 아기를 낳는다면 그 애가 이 학교에 다닐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라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들에 대한 상상을 공유하며 한껏 누그러진 봄바람을 함께 맞았다.


자주 가던 갈빗집에 방문해 오랜만에 달고 부드러운 소갈비를 먹었다. 늘 주문하던 영양돌솥밥, 된장찌개, 냉면을 주문했고 A앞에는 상추를 두고 내 앞에는 피클류의 반찬을 뒀다. 서로 선호하는 밑반찬을 고려한 합리적인 배치다. 먹기 좋게 일부 밑반찬을 정렬하는 네 개의 손과 갈비를 음미하는 두 개의 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식사를 마친 뒤 커피를 즐기기 위해 신호등을 건너 빈티지한 콘셉트의 카페로 들어갔다. A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아이스 플랫 화이트. 원두를 선택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함께 산미 있는 원두를 골랐다. A는 4계절 내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나는 아메리카노와 플랫화이트를 주로 마시며 상황에 따라 핫과 아이스를 고른다. 커피를 홀짝이며 내년쯤 이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를 하다가 잠시 머리가 복잡해져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아이를 갖는 시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한다. 수차례 주제가 바뀌던 대화는 저녁에 뭐 먹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종결되었다. 카페 밖으로 나와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걸어야 한다며 2시간을 넘게 걸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어묵을 포장했다. 나는 떡볶이와 순대를, A는 떡볶이를 제외한 어묵과 순대를 먹을 거니까. 두 입맛의 공통분모는 순대다.



A와 함께 보낸 하루를 되돌아보니 문득 우리의 호흡이 제법 맞춰졌다는 걸 느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나 계산해보니 1년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앙증맞은 기간이지만 상대보다 내 자존심이 먼저였던 서로에게 날 세웠던 모습들이 뭉뚝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치킨을 시키면 A는 젓가락으로 발라먹는 것을 나는 포크 두 개로 살을 발라먹는다는 것에 익숙해져서 치킨이 도착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젓가락과 포크를 동시에 집고, 샤워할 때 욕실화를 신고 하는 A와 맨발로 하는 나의 차이를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또 A의 생일엔 고구마 케이크나 초콜릿 케이크를 나의 생일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 것으로 암묵적인 규칙이 정해졌다. 쉬운 일들 같지만 분명 서로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반영된 결과물들이다.


자존심을 날카롭게 세우며 서로에게 던졌던 수많은 아픈 말들은 각자의 마음속 어딘가에 분명 남아있겠지만, 그 아픔을 감내하며 수많은 노력으로 만든 둘 만의 호흡에 감사한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 동안 단편적이더라도 환상적인 호흡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보려한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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