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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온 Feb 10. 2024

prolog 02

초대하지 않은 손님, 번아웃

<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와 매사 자신감 있게 생활하는 면 >

< 성격이 차분하고 온화하며 따뜻한 품성을 가지고 있으며 >

< 어떤 상황에서도 움츠리지 않고 자신감 있게 행동 >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내용이다. 12년 생활 모두 솔선수범, 문제해결 능력 우수, 자신감 있는 행동,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이라는 말이 늘 뒤따라 왔었다. 성적도 나름 우수하게 나오는 편이었고, 책도 많이 읽고, 미술과 문학에 재능을 보이는 학생 1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학생 1은 개인사정으로 무연고지의 대학교에 입학을 했고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12년을 솔선수범하며 차분한 성격으로 문제해결을 해왔으니 비록 무연고지라 한들, 대학생활 적응도 문제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때는 2021년 봄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생일이 들어있는 5월이었다. 그때의 나는 스물의 성장통을 겪었다. 시작은 4월이었고 마지막은 8월 언젠가로 추정된다. 일에 진심인 워커홀릭에게도 번아웃은 온다. 그리고 일에 미쳐있었던 자가 일을 하고 싶지만 하기 싫고, 잘해왔지만 못하면 미쳐버린다.


번아웃이 오게 된 계기는 향수병과 인간관계, 전공에 대한 혼란이 동시에 나를 덮쳐와서였다.

이곳에 어서 적응하고 싶다는 마음 반, 떠밀림 반으로 맡은 학과대표. 1년이 정말 힘들었다. 밤낮없이 학업과 함께 일을 해야 했고, 동기가 쳐놓은 사고를 수습하며 교수님께 자정 넘어 사죄 연락을 드린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왜 그랬는가 이해는 안 되지만, 친구 윤재온이 아닌 과대표 윤재온을 원하여 접근한 동기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첫 중간고사 마지막 날 새벽에 난데없이 손절 통보를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외로 내가 과대표로서 뽑아먹을 게 없어서 그냥 버린다는 걸 애써 숨기는게 너무 티가 나 역겨웠다. 나 역시 이 학과에 확실성을 못 가진 상태였고, 코로나 사회의 신입생인데 무엇을 바랐을까.

원래는 임상복지 또는 사회복지, 그 다음은 특수교육을 고3 4월까지 꿈꾸다 유아교육과로 희망진로를 전향한지 반년 만에 대학교 수시 원서 접수를 했기에 뒤늦은 혼란이 찾아오기까지 했다. 내가 과연 교사의 자질이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차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방황을 하게 만들었다.


확실한건, 그때의 나는 맨정신은 아니었다. 평소에 스트레스와 부정적 감정을 되도록 어떤 일을 함으로써 잊어내자 하는데, 번아웃이 오자 일에 흥미가 떨어지고 집중하지 못해 일을 하지 못하여 점차 마음에 부담이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저 영혼은 어디 빼둔채 일하는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나 스스로를 무척 원망하였다. 그때 개인적인 일과 과대표 업무, 학기말 과제 준비, 팀플 등으로 정말 온몸 부서지게 일하는 시기였다.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란 때에 번아웃이라니. 복에 겨워하는 투정 같았고, ‘나의 한계가 고작 이 정도야?’라는 화도 났다. 지금의 나라면 정말 과거의 나를 뜯어말렸을 것이, 무기력과 우울감으로 일의 효능이 떨어지고 진행속도가 느려지자 밤을 새워서라도 마감기한을 지키고 평소 업무나 과제 퀄리티를 유지했다. 감정선이 엉망이니 업무선은 잘 지키자는 어리석은 독기였다.


카페인으로 피를 적신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방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미니 냉장고에는 언제나 에너지 음료 캔 대여섯 개가 있었다. 원래도 주변에서 걱정할 만큼 수면량이 적은데, 더더욱 잠을 안 자니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점점 몸이 아파왔다. 카페인 부작용과 스트레스성 위경련으로 인해 식사가 점점 힘들어졌었다. 처음에는 찌개 같은 냄새 강한 음식에 메슥거림이 느껴졌다면, 점점 조미된 음식과 느끼한 음식을 먹은 후 체했고, 번아웃이 정점을 찍었을 때의 내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이온 음료와 묽은 콘수프, 삶은 견과류가 다였다. 일반식을 먹을 수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소화를 종일 못하여 결국 몇 안되어 게워냈다.

뿐만 아니라 몸살도 심했다. 아침에 눈 뜨면 앓으면서 몸을 일으키고, 밤에 잠 잘 때 앓으면서 몸을 눕혔다. 머리는 차라리 깨지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욱신거려 오거나, 가끔은 일자로 걸어가기 조차 안될 만큼 어지러웠다. 두통과 요통, 관절통이 한 번에 왔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열 발자국도 채 안 되는 거리를 걸어갈 힘이 없어 하루종일 침대에 있기도 했다. 이런 내 몸 상태에 혹시나 하며 코로나 검사도 몇 번이나 했지만, 항상 음성이었다. 보통의 일상이 매우 간절했지만, 나는 보통의 상태로 돌아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스스로 문제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나는 없었다. 아마 이게 시작이었고 전조증상이었는지 모른다. 1년 뒤 처절하게 망가질 나의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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